사진으로 회상하는 '인천의 본향', 신포동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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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회상하는 '인천의 본향', 신포동 20년
  • 송정로 기자
  • 승인 2020.06.25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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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섭 작가, 사진집 '신포동 사람들' 출간
공사 전의 시장 풍경 2002.12
신포시장 두 번째 골목이다. 상점마다 쳐 놓았던 차일을 걷으니 이런 모습이 나온 것이다. 이제 차일 대신에 채광창을 덮어쓸 것이다.​​​​​
 

‘탁포(坼浦), 터진개 신포동이야 인천 저잣거리의 효시(嚆矢). 거슬러 개항 무렵까지 따져 올라가지 않는다 해도 이곳은 6․25 사변 이후 90년대에 이르도록 가난했지만 인천 문화의 요람, 인천 사람들 삶의 중심지였다.’ (시인 김윤식)

김보섭 사진작가가 5년만에 사진집 ‘신포동 사람들’을 출간했다. 부제 ‘그리운 옛 얼굴과 정겨운 옛 골목’이 말하듯 '인천 저잣거리의 효시' 신포시장을 중심으로 신포동에서 놀고 먹고 마시고 일하던 사람들의 면면과 점포들, 그 뒷골목의 정취를 생생하게 살려냈다.

작가는 2000년대 들어 지난해까지 자신이 셔터를 눌러온 사진 175장을 차곡차곡 실었다. 지난 20년간 변화해온 신포동의 모습과 신포동을 누빈 ‘주역’들을 하나하나 만나볼 수 있다.

80, 90년대 찍은 사진도 몇장 실렸다. 전설의 ‘백항아리집’ 항아리와 할머니 사진 등이 그것이다.

‘신포주점’의 1,2,3대 사장님들, 영양탕 전문 ‘북청집’ 사장님과 며느리, ‘경인식당’의 노모와 아들, ‘다복집’과 ‘대전집’ 사장님, 팻션 감각이 넘치는 ‘김 테일러’ 사장님, 러시아 선원들의 단골집이었던 ‘치킨꼬꼬’, 개업 57년의 백반전문 ‘명월집’ 사장님, 대를 이으며 70년이 넘은 ‘성광방앗간’ 사장님, 40년 연륜 ‘탄트라’의 야외 테이블, 석양의 카페 ‘푸코’, '등대경양식' 주인, ‘중앙설렁탕’ 원주인, ‘흐르는 물’, ‘국제다방’... 유서깊은 술집들과 음식점을 망라하며 주인들과 함께 하나 둘 씩 등장한다.

그리고 단골손님들. 화가와 시인, 아동문학가, 조각가, 연극연출가, 사진가, 드러머 등 예술인들, 체육계 주먹, 음악감상실 DJ, 교사들, 목사... 등이 영원한 산책자, 베가번드, 보헤미안 등등의 이름으로 출연하며 흥미를 더한다.

죽은 자들과 산 자들, 신포동을 떠난 이들이 함께 사진들 속에 어울어진다. 지금은 없어진 점포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청소년이 담배피던 신포동 뒷골목, 미로같은 수제비골목, 세월로 초라해진 상가 옥상의 민낮, 옥상의 건어물 건조장 등 신포동의 속살들도 다 드러낸다.

‘신포동 사람들’에 등장하는 점포들과 인물, 옛 정취를 쓴 길고 짧은 글(사진설명)도 또 다른 ‘신포동 생활史’다. ‘중구 신포동 언저리, 인천 사람들 마음의 본향’ 제하로 사진집 글머리를 쓴 김윤식 시인이 하나씩 공들여 썼다.

게재된 사진을 전시하는 행사는 코로나19 때문에 7월로 연기됐다. 사진집은 사진전문 '눈빛'에서 출판했다.

 

신포동 뒷골목

 

술 취한 세 회백 2003.12
이철명, 정순일, 김진안 세 화백이 어느 겨울날 대취한 모습이다. 방금 기분 좋게 맥주집 문을 나선 듯 행복하게 웃고 있다. 이 예술가들의 얼굴에서 어린애 같은 천진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강직, 절개(節槪)의 대명사 우문국 화백 (사진, 우경원 제공)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46년 5월 서예가 류희강(柳熙綱)과 중국 상해에서 귀국해 인천에 정착한 이래 인천 문화, 예술계에 많은 족적을 남긴 분이다. 인천 미술계는 그에 의해 기초가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포시장 간이 어물 건조장 2000. 10
19세기 말경 신포동에 생겨난 생선전(生鮮廛)의 전통을 이어 신포시장은 생선 시장의 중심이었다. 생선과 건어물을 파는 상점이 시장 위아래 골목에 즐비했었다. 당시 생선을 말려 건어물 상품으로 내놓기 위해서는 건조장이 필요했는데 시장 건물 옥상이 바로 좋은 덕장이 되었다.
영원한 신포동의 산책자 최승렬 선생 1996. 4
제물포공등학교 국어 선생이었던 분이다. 시인이요 아동문학가였다. 큰 체구와 높은 콧날 때문에 제자들로부터 ‘코보’라는 곱지 않은 별명을 얻으셨던 분이다.  신포동을 산책하다가 단골 다복집에 들르시곤 했다.
신포동의 클라크 게이블 강세원 회장 2005. 11
90수를 넘기고 근년에 타계하셨다. 생전에 매일 오후 3시쯤이 되면 한적해지는 중앙동 거리를 아주 천천히 자신의 단장(短杖) 소리를 음미하듯 걸어 신포동으로 나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전형적인 신포동 신사 오일웅 회장 2003. 4
중절모에 파이프를 문 오 회장의 모습에서 언뜻 인천항 부두, 혹은 마도로스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인천의 터주 한 분으로 고려대 인천 교우회장을 지냈다.
홈런 바 사장 이상하 씨 2005. 11
늘 댄디한 복장으로 신포동 골목을 누비던 이상하 씨. 옛 외환은행 뒷골목에서 홈런 바라는 크게 화려하지 않은, 은은한 불빛의 잘 정돈된 가지런한 바를 운영했었다.
영원한 인천의 베가본드 이태모 씨 2016. 12
중구 해안동 ‘등대’경양식 주인 이태모 씨다. 1937년생으로 젊은 시절의 상당 기간을 이국의 화물선이나 상선의 갑판 위에서, 먼 나라 낯선 항구 도시의 술집들과 뒷골목에서 보낸 방랑자로 유명하다, 아프리카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어느 바에서 담배 갑을 서로 교환하다가 사소한 시비가 붙어 불란서군 대위를 한 주먹에 녹아웃 시킨 일도 있었다.
골목대장 홍정식 씨 2019. 8
미스터 유니버스대회에 참가했었다. 문화극장 기도주임으로 있었고, 수협 공판장에도 근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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