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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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던 아이들
  • 권근영
  • 승인 2020.07.08 0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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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14) 인구가 남숙의 속상함을 알게 되기까지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맥아더장군 동상 앞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가운데 모자를 비스듬하게 쓰고 있는 아이가 인구이다.
맥아더장군 동상 앞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가운데 모자를 비스듬하게 쓰고 있는 아이가 인구이다.

박치기왕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동네 집은 동네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텔레비전이 있기 때문이다. 수도국산 달동네에서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선생네와 경동네 두 집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선생네 드나들기를 조금 어려워했다. 어르신은 교장 선생이고, 아들과 며느리도 학교 선생이라 어쩐지 조심스럽고 교양을 갖춰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반면 경동이 엄마는 사람이 순하고 마음씨가 고와서 동네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경동네는 남숙네 바로 아랫집에 살고 있다. 남숙네 집 마당 앞으로 경동네 지붕과 굴뚝이 있었다. 대문을 열고 나가면 오른쪽 담장으로 경동네 집 창문이 나 있다.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텔레비전을 조금이라도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엉덩이를 하늘로 높이 치켜든 아이가 하나 있었다. 남숙의 첫째 아들 인구다.

인구는 한 달에 한두 번 만화방에 갔다. 송림초등학교 후문으로 난 길에서 수도국산 방향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만화방이 있었다. 인구는 투견 만화를 좋아했다. 하얗고 동그란 눈알이 방울방울 달린 강아지의 큰 눈동자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 초롱초롱한 눈이 다른 개와 싸울 땐 아주 날카롭고 맹렬하게 변했다. 이향원 만화가는 투견에 대한 이야기로 만화를 많이 그렸고, 나중에 야구 만화도 그렸다. 특히 신기했던 건 변화구다. 공이 날아오다가 타자 앞에 딱 멈춰서더니, 타자가 스윙하고 나면 공이 배트 사이로 빠져나가서 글러브에 쏙 들어가는 거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시원해지는 쾌감이 있었다. 인구는 한 권을 다 보면 다음 책을 보고 싶어서 남숙의 치맛자락을 잡고 졸랐다. 겨우 돈을 얻어내 만화방에 가면, 이곳엔 인구를 사로잡는 또 다른 재미난 거리가 있었다. 바로 텔레비전이다.

만화방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네 개의 나무다리가 달렸고, 자바라 형식의 여닫이 나무 문이 달린 모양이었다. 돈을 내고 먼저 들어온 아이들이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차지하고 바닥에 앉아있었다. 김일 레슬링도 보고, 권투도 보고, 만화도 봤다. 아이들이 많이 몰려온 날은 뒤에 서서 봐야 했는데, 머리 냄새가 지독했다. 땜통을 앓아 머리에 동그랗게 구멍이 난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기어가는 이, 입은 옷 재봉선 사이에 하얗게 앉은 서캐(알)들이 한 데 섞여도, 가려운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텔레비전을 봤다. 밤마다 손톱으로 이를 터뜨리고, DDT를 옷에 뿌려두어도 만화방에 와서 한바탕 섞이어 놀다 집에 돌아가면 소용이 없었다.

인구는 텔레비전이 너무 좋았다.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흑백 그림자와 소리만으로도 행복했다. 경동네 집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지난 겨울, 경동네 지붕에 떨어뜨린 연을 주우러 몰래 올라갔다가 경동이 아버지에게 걸려서 혼쭐이 났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경동이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도록 살금살금 피해 다녔다. 경동네 담벼락 창문에 붙어 엿보는 게 최선이었다.

남숙은 와룡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앞집 창문에 들러붙어 있는 인구의 꽁무니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금성’ 표가 붙은 흑백 텔레비전을 사오고 싶었지만, 너무 비쌌다. 남숙네 형편으로는 텔레비전을 살 수 없었다. 남숙은 괜히 구차해지고 비굴한 마음이 들었다. 속상하고 꼴 보기 싫어서 되려 인구를 야단했다. 소리를 높일수록 이상하게 미안함도 커지는 것이었다.

인구는 송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다. 등록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옆 집 창구형이 일하는 창영초등학교 등사실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했다. 등사실에서는 주로 시험지를 만들었다. 선생이 시험 문제를 만들어서 적어 보내면, 그 내용을 기술자가 등사원지에 다시 적었다. 등사원지는 8절지 정도의 도화지 사이즈로 기름종이처럼 얇았다. 철필로 시험 문제를 적고, 틀에 끼운 다음 잉크를 묻힌 로라를 굴린다. 그럼 맨 아래 있는 종이에 시험 문제가 적혀 나오는 거다. 전문 기술자가 이 작업을 하면, 인구는 종이를 반듯하게 정렬하는 일을 했다. 시험지를 추리는 일은 수작업으로 해야 했고, 자주 손을 베였다.

인구의 손은 종이에 베여 상처투성이였다.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문득 서러워졌다. 이대로 계속 시험지를 만들며 지내고 싶지 않았다. 종이를 정리하는 일이 너무나도 무료하다는 생각과 함께 담배 심부름도 그만하고 싶었다. 이 손으로 앞으로 무엇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또래 친구들처럼 연필을 쥐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구는 6개월 만에 등사실 일을 그만두고, 중학교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중학교에 입학한 동갑내기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울 때 인구는 입학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연도에 시은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갔다. 1970년에는 지붕 개량사업으로 송림동 집 초가지붕이 기와지붕으로 바뀌었고, 동네에 가전기기를 파는 외판원들이 돌아다녔다. 남숙네도 드디어 텔레비전이 생겼다. 외판원에게 월부로 산 거다. 가전 분야에서 인기가 좋은 ‘대한전선’ 표 텔레비전을 마루에 들여놓았다. 남숙의 남편 형우는 어쩌자고 이 비싼걸 사 왔냐고 야단이었다. 남숙은 자기가 부지런히 벌어서 다 갚을 거라고 말했다.

동네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남숙네 마루에 몰려들었다. 남숙의 둘째 딸 도영은 텔레비전 열쇠 담당이었고, 가끔 채널이 맞지 않으면 인구에게 안테나를 맞춰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인구는 지붕에 올라가는 일이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지지직거리던 화면이 깨끗하게 맞춰지면, 집안에서 아이들이 환호를 보내왔다. 그 기쁜 환호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마루와 안방에 가득한 동네 아이들을 보자 인구는 자신의 어릴 적이 떠올랐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창문 틈으로 텔레비전을 훔쳐보는 아들을 바라본 남숙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구는 혼을 내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더 아팠을 남숙을 생각했다.

 

 시은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한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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