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초읽기여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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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초읽기여도 괜찮다
  • 정민나
  • 승인 2020.07.09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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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인생이 초읽기여도 괜찮다 / 조수현

인생이 초읽기여도 괜찮다

                                          - 조수현

 

바둑 시합 때는

‘초를 재는 초시계가 있다

우리는 칠순 줄이어서 초읽기가 시작되면 당황한다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초읽기가 습관화되어 침착하다

‘딱딱’ ‘척척’ 그 소리가 귀엽게 들린다

나의 젊음도 초읽기 속에서 푸르렀다

아침에 일어나 들일을 하노라면 어느 새

여름이 오고 땀 흘린 들판에 새들이 날아들었다

똑딱똑딱 초시계 소리에

곡식이 자라고

나도 모르게 생의 나이테가 싱싱하게 넓어졌다

어쩌다 태풍이 와서 주판을 두드리는 계절이 상심하여도

농사짓는 젊은 농부는

당황하지 않고 초시계를 잘 활용하여

가라앉는 몸을 추스렸다

바둑알을 잡은 두 손가락이 흔들리고

들었다 놓았다 어리버리 노인이 되었지만

지금은 ‘초’를 재는 초시계를 손녀에게 물려 주었다

‘척척’ ‘딱딱’ 귀여운 그 소리를 들을 때

아직도 내 가슴은 뛴다

 

*

경험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면 개성적인 글쓰기가 된다. 위의 글을 쓴 시인은 실제로 바둑에서 아마 5단의 실력을 갖추고 있고, 바둑계에서 그 유명한 조훈현 기사와는 모임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는 친족 관계이기도 하다.

우리가 인생을 ‘초읽기’로 말한다면 듣는 사람은 불편할 것이다. 너무 경쟁적이고 경직된 세상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시의 제목에서 보듯이 ‘인생이 초읽기여도 괜찮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시간상 어떤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초읽기’라 할 수 있는데 왜 이런 화두를 던졌을까?

바둑에서 ‘초읽기’는 버튼을 눌러 한 사람의 시간이 멈추고 다른 한 사람의 시간이 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제한 시간이 5분이나 10분 정도 남았을 때 기록을 담당한 사람이 초 단위로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다. 시간제한에 걸려 패하지 않기 위해서 선수는 집중하여 수를 읽어야 하는데 그 시간은 얼마나 긴장되는 순간일까?

시인은 본인이 이제는 칠순 줄이어서 “초읽기가 시작되면 당황”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반면 초읽기가 들어가도 침착하게 바둑을 두는 젊은이들을 귀엽게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시인은 자신의 인생을 ‘초읽기’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표현한다. “나의 젊음도 초읽기 속에서 푸르렀다 / 아침에 일어나 들일을 하노라면 어느 새 / 여름이 오고 땀 흘린 들판에 새들이 날아들었다”고 진술한다.

젊음의 현장은 ‘초시계’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르게 진행된다. “똑딱똑딱 초시계 소리에 / 곡식이 자라고 / 나도 모르게 생의 나이테가 싱싱하게 넓어”진다. 자신의 일을 직시하고 집중하여 성취하는 기쁨을 알고 있는 자. 그리하여 노인이 된 지금 내면이 고요한 시인은 가슴 속에 있는 소년을 캐어내는 순정한 기쁨을 관조한다. “어쩌다 태풍이 와서 주판을 두드리는 계절이 상심”하였어도 // 농사짓는 젊은 농부는 / 당황하지 않고 초시계를 잘 활용하여 /가라앉는 몸을 추스렸다“ 이 얼마나 개성적인 시적 발상의 전환인가? 새로운 관찰은 늘 삶의 의미를 되짚어 주고 확장시킨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는 것처럼 늙은 시인은 자기 생에서 깨달은 지극한 지혜를 독자에게 돌려준다.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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