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간직하고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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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간직하고 있는 삶
  • 최원영
  • 승인 2020.07.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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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행복산책
(109) 인생은 일방통행

 

풍경 #149. 인생은 일방통행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어릴 때의 꿈, 어른이 되어서의 꿈, 노인이 되어서의 꿈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꿈이든 간에 꿈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꿈 중에서 특히 어릴 때의 꿈이 가장 아름다운 것은 현실적인 때가 덜 끼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의 꿈이야말로 평생을 가슴에 담고 있을 만큼 소중한 꿈이기도 합니다.

꿈을 잃어버린 삶은 목적지를 모른 채 자동차를 끌고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일 저 일에 참견하며 분노하고 원망하는 일로 분주하기 마련입니다.

《장자 멘토링》에 초고층 아파트 80층에 사는 형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제는 자정이 넘어 현관에 들어선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보니 공교롭게도 자정부터 운행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있다. 아침에 나갈 때도 붙어 있었는데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형제는 등에 크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었다.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혈기왕성하게 오른다. 20층까지 오르자 배낭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배낭을 20층에 두고 올라갔다가 내일 새벽에 가져가기로 했다. 배낭을 내려놓자 가뿐해진 형제는 가볍게 웃고 떠들며 올랐다. 40층에 이르자 다리가 뻣뻣해지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둘은 헐떡거리며 서로를 원망했다. 형이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 왜 안내문도 안 봤어?’

‘깜빡했지. 그러는 형은 왜 안 봤어? 나만 봐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힘겹게 다시 올랐다. 60층에 오르자 더 싸울 힘도 없었다. 묵묵히 계단을 올라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외친다.

‘열쇠!’

20층에 놓고 온 배낭에 열쇠를 넣어둔 것이다.”

저자는 말합니다.

“이게 우리 인생이다. 인생이 꽃필 무렵엔 누구나 의기양양하다. 등에 멘 배낭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안에 이상과 꿈과 희망이 들어있다. 길이 험난해도 두렵지 않다.

20대에 이르면 사회에는 여러 규칙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 부담스럽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래도 저항의 몸짓을 해보지만, 마음은 이미 지친다. 등에 멘 꿈과 이상의 배낭이 슬슬 거추장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래, 잠시 내려놓자.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사회적인 지위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그때 다시 가져가도 늦지 않을 거야.’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한다. 꿈과 이상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나이를 먹을수록 생활은 안정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는다.

‘그래, 이런 게 사는 거야.’

배낭은 까맣게 잊은 채 즐겁게 살아간다.

그러나 40세가 넘어 재산이 많아지고 명성과 지위가 올라갈수록 경쟁은 오히려 더 심해지고 설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마음을 초조하게 한다. 모든 것을 바쳤는데 돌아온 것은 배신뿐이라는 원망도 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산다.

60세 고개를 넘어서면 어느덧 지치고 기운이 빠져 젊은 시절의 기세등등함은 찾을 수 없다. 이젠 조용히 살면서 아름답고 편안한 말년을 보내리라 마음먹는다. 이때가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의 시기다. 남을 원망하지 않고 현실 변화에 순응하며 80세까지 걸어간다.

마지막 지점에 서 있노라면 문득 진한 슬픔이 가슴 가득 밀려든다.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꿈과 이상과 오색 빛 희망을 20세의 배낭 속에 두고 온 것이 그제야 생각난다. 한번 펼쳐보지도, 날려보지도 못한 꿈! 공연히 제 한 몸뚱이만 이끌고 어느새 인생의 종착역에 와버린 주름진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흐르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인생은 일방통행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의 꿈은 매우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 꿈은 ‘사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꿈은 마음속에 있지만, 사명은 실생활에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삶은 사명을 수행하는 장소가 되어 자신이 살아가는 분명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는 곧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생겨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향이 납니다. 그 향에 이끌려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한 사람이 만들어낸 고운 향이지만, 그 향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어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겁니다.

백 년 가까이 보장받은 삶이라는 시간 동안 20대에 배낭 속에 넣어두고 잊고 살아왔던 ‘꿈’을 다시 끄집어내어 ‘사명’으로 삼아 살아가면 어떨까요.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그렇게 사는 삶이 천상병 시인이 말한 것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요.

시인의 ‘귀천’이란 시를 전해드립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이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아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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