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1973, 인순과 선애의 떠도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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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973, 인순과 선애의 떠도는 삶
  • 권근영
  • 승인 2020.07.22 0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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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15) 다시 만난 남숙과 인순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어느 날 인순이 사라졌다. 인순의 남편은 동인천역 여인숙 골목을 샅샅이 뒤졌다. 어디에도 인순은 없었다. 남자는 인근 여관에서 조바로 일하던 여자도 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송림동 수도국산 달동네에 사는 인순의 큰언니, 남숙의 집을 찾아갔다. 안방과 부엌, 광과 변소까지 구석구석 뒤졌다. 내 마누라 내놓으라며 윽박지르고 물건을 헤집어놓았다. 남숙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귀하면 진즉 아꼈어야지, 만날 묶어놓고 두드려 패니 사람 몸이 성하겠냐고 화를 냈다. 아주 잘 도망갔다고, 멀리멀리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리쳤다.

반은 진심이고, 반은 진심이 아니기도 했다. 남숙에게 인순은 아주 귀한 막냇동생이었다. 한국전쟁 때 월미도에서 문경까지 같이 피난 다녀오며 제 목숨처럼 아끼고 보살폈던 동생이다. 호기심 많고 말주변이 좋아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금세 친해지고 인기가 좋았다. 그런 동생이 술주정뱅이 빵떡 장수와 혼인하고, 잔인한 주먹질에 멍투성이 몸으로 살아간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 계속 곁에 두고 보고 싶은 동생이었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누구와 살든 상관없었다. 아프지만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남숙의 아들 인구도 그랬다. 인구는 가끔 송림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마치면 인순의 집에 놀러 가곤 했다. 동인천역 앞 축현파출소와 철길 사이로 난 골목길, 그 끝에 있는 집이었다. 이모, 하고 부르면 만화방 가고 싶냐며 인구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용돈을 줬다. 어느 해 겨울에는 개울물이 꽁꽁 얼고, 바람이 매섭게 불 정도로 추웠다. 인구에게 두 발을 모아 오므려 앉히고, 양손을 꼭 잡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인순이 인구의 손을 잡고 빙판을 냅다 달리는 거다. 추운 줄도 모르고 얼음판을 쌩쌩 달리며, 조카와 겨울을 즐기는 개구쟁이 이모였다. 다정하고 장난기 많은 인순의 얼굴에 멍과 그늘이 졌던 날들을 떠올리며, 인구도 인순의 행복을 기도했다.

인순과 함께 동인천을 떠난 여자의 이름은 선애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한 번 더 들어가야 나오는 작은 섬에서 1944년에 태어났다. 선애가 3살 때 여동생이 태어났고, 8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빠는 바로 새장가를 들었다. 새엄마는 4명의 자식을 데리고 왔다. 한 지붕 아래 어른 둘과 아이 여섯이 살게 되었다. 새엄마는 서울 부잣집에 가정부로 새 남편의 딸들을 보내자고 설득했다. 거기 가면 배는 굶지 않을 거라며. 자기가 인성 좋은 집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사람이 온 날, 동생은 고모 집에 놀러 가고 없었다. 동생은 키가 크고 덩치가 있었고, 먹성이 좋았다. 새엄마는 동생도 서울로 보내고 싶어 했지만, 배 시간 때문에 선애만 딸려 보냈다.

서울에서 식모살이하던 선애가 아무 연고도 없는 인천에 와서 살게 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동인천역 앞 여관에 조바로 일을 하게 된 건 17살 때다. 그 집에는 선애와 동갑내기 딸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 정갈하게 다려진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갔다. 고등학교에 가는 모습이 부러워 선애는 자주 그 뒷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1960년 선애가 17살 나이일 때 23살인 인순은 첫째 딸 윤희를 낳았고, 2년 뒤에 아들 윤철을 낳았다. 인순은 집을 오갈 때마다 같은 골목길에 있는 여관에서 일하는 선애와 마주쳤고, 둘이 언제부터 인사를 주고받았는지는 모른다. 어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언제부터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는지는 둘만이 알 뿐이다. 1968년 인순과 선애가 사라졌다.

선애는 인순을 데리고 자신의 고향으로 갔다. 아빠와 새엄마 집에 머무르며 멸치 장사 일을 도왔다. 새엄마는 계속 눈치를 주며 구박을 했다.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았다. 둘은 살 궁리를 했다. 완도에서 질 좋은 미역과 김을 저렴한 가격에 떼서 서울에 가져가 팔기로 했다. 오류동 시장에 작은 가게를 하나 마련해 장사를 시작했다. 선애는 새엄마와 자꾸 부딪히고 싶지 않아서, 물건을 떼 오는 일은 인순이 맡았다.

인순이 완도에 내려가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서 물건을 해오는 데 1박 2일이 걸렸다. 서울에서 완도까지 내려가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데 하루가 걸렸고,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물건을 해서 배를 타고 나와 서울로 올라오는데, 또 하루가 걸렸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한 번은 물건을 배에 싣고, 육지로 가는 중에 배 주인이 바다 한가운데 배를 멈춰 세웠다. 배 주인이 자기 배를 직접 운전했는데, 배에 탄 사람은 인순 뿐이었다. 그는 여러 번 물건을 해가는 인순을 지켜보았고, 섬에서 같이 살자고 말했다. 배 위에 두 사람이 쫓고 쫓기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인순은 꾀를 내었다. 자기가 서울 큰 회사에 물건을 납품하는 사람인데, 지금 확인하러 사람들이 부둣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걸 확인시키지 않으면 배를 구해 경찰이 들이닥칠 테니, 업무를 마무리하고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타일렀다. 그는 알았다고 했다. 인순은 육지에 배를 대자마자 도망을 갔다. 그 이후로 오류동 시장에서 미역과 김 파는 일을 그만두었다.

인순과 선애는 서울 마포로 갔다. 방 하나가 딸린 작은 가게를 하나 얻어 만두 장사를 시작했다. 선애는 손이 아주 야무졌다. 성격도 꼼꼼해서 음식을 아주 예쁘고 보기 좋게 잘 만들었다. 장은 경동시장에서 봤다. 무말랭이를 2~3일 물에 푹 불려 총총 썰어서 돼지기름을 섞어 속 반죽을 하면, 고기 씹는 것처럼 식감이 아주 좋았다. 밤에 만두를 만들어 놓고, 새벽에 일어나 푹 쪘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뜨끈뜨끈한 만두는 한 번 먹어본 사람을 꼭 다시 찾게 했다. 만두를 남기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인천을 떠난 지 5년이 지났다. 인순은 동기간 소식이 궁금해졌다. 기별을 넣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위의 오빠 경수와 큰언니 남숙이 찾아왔다. 경수는 오자마자 진열된 만두를 길바닥에 던져버렸다. 냄비며 그릇이며 다 집어던지고, 바닥에 떨어진 만두를 발로 짓이겼다. 계집애들이 뭐 하는 짓이냐며 당장이라고 때릴 기세였다. 남숙이 경수를 막았다. 교통사고 나서 죽어가는 놈 살려놨더니 어디 지금 막냇동생한테 와서 화풀이냐고, 인순이가 뭘 잘못했냐, 육갑 떨지 말라며 세게 다그쳤다. 남숙은 인순이 살아서 연락을 준 것만으로도 좋았다. 정말 멀리 가서 영영 못 보면 어쩌나 걱정했던 인순을 이렇게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랄 게 없었다. 남숙은 인순과 선애를 꼭 안아주었다.

 

왼쪽부터 인구의 배필인 연희, 남숙, 인순, 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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