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뺑이’가 다 무슨 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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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뺑이’가 다 무슨 소용?
  • 권근영
  • 승인 2020.08.05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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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16) 가난의 무게를 나눠진 인구와 도영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한 번. 그러면 은행알 하나가 물레 밖으로 툭 떨어져 나왔다. 뺑뺑이를 말하는 거다. 1968년 12월 초등학생들에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라고 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문교부에서 중학교 평준화 계획을 발표했다. 1969년 2월 서울을 시작으로 1970년에는 대도시에서, 1971년에는 전국적으로 중학교 무시험 전형이 시작되었다. 시험성적에 따라 결정되던 중학교 입학이 수동식 추첨기를 돌려 배정받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뺑뺑이’라고 불리는 물레 모양의 추첨기를 돌리고, 그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1972년 2월 송림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물레 앞에서 앞으로의 3년을 힘껏 돌릴 때, 남숙의 딸 도영은 뺑뺑이를 돌리지 못했다. 지난해 봄, 남숙의 남동생 경수가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진 이후 모든 돈이 병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도 겨우 마칠 수 있었던 도영은 중학교 입학금과 수업료를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교복도 사달라고 할 수 없었다.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었는데 등록금은 여전히 비쌌다. 도영은 도대체 무엇이 평준화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외전거리에서 일하는 형우는 청과물 시장 옆 사탕 공장에 딸 도영을 소개했다. 도영은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사탕을 봉지에 싸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5킬로를, 그다음에는 10킬로를 가져가서 포장했다. 일하는 시간만큼이 아니라 사탕 무게만큼 돈을 받았다. 점점 일이 손에 익었다. 사탕 하나를 포장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졌고, 그만큼 중학교에 갈 수 있는 날이 빨리 다가오는 희망을 품게 했다. 도영은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중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일한 지 몇 개월이 지났다. 도영의 손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터뜨려서 헝겊으로 처맸는데도 잘 낫지 않았다. 반장 아줌마가 도영의 손가락을 보더니, 사장에게 데리고 갔다. 사장은 도영을 다그쳤다. 이런 손으로 사람이 먹는 사탕을 싸면 되겠냐며 나무라고는 다시는 공장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사탕 공장을 나온 도영은 양키시장 쪽으로 걸었다. 오성극장에서 수도국산 언덕으로 난 길을 쭉 올라가다 약국에 들어갔다. 약사는 가만히 살피더니 손가락 무좀이라고 했다. 며칠만 약을 먹으면 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도영은 자신의 손가락이 아픈 것이 자꾸만 수치스러웠다. 일한 값을 받으러 가지도 못하고 동동거리고 있으니, 형우가 사탕 공장에 가서 월급봉투를 받아 왔다. 그 돈은 고스란히 가족들 생활비로 쓰였다.

도영의 손가락이 아물어가던 즈음, 1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하던 경수가 퇴원했다.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6개월, 일반 정형외과에서 6개월 치료를 받고 퇴원한 경수는 부인과 이혼하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아이 셋만 데리고 남숙네로 들이닥쳤다. 이때 함께 살게 된 남숙의 엄마 기돌돌은 죽었다 살아 돌아온 아들이라며 경수를 극진히 챙겼다.

기돌돌은 남숙이 벌어온 돈으로 쌀을 샀다. 밥에 물을 많이 넣고 푹 끓여서 죽을 만들었다. 쌀을 못 사는 날이면 밀가루 반죽을 해 수제비를 떴다. 정부에서는 혼·분식 장려운동과 무미일(無米日)을 지정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하는 양곡관리법도 마찬가지다. 도영은 먹고 뒤돌아서면 금방 다시 배가 고파지는 쌀죽이 너무 싫었다. 쌀이든 밀이든 잡곡이든 무엇이라도 좋으니 배부르게 먹어보고 싶었다. 기돌돌은 항상 쌀을 사고 돈을 남겼다. 그 돈으로 삶을 비관하는 경수에게 술과 담배를 사줬다. 술에 취한 경수는 큰 목소리로 떠들며 수도국산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그 해 시은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한 인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벌어 가계에 도움이 되어야 했다. 부평에 스웨터 짜는 공장에 취직했다. 인구보다 먼저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동갑내기가 텃세를 부렸다. 마주칠 때마다 하대하고 아주 못살게 굴었다. 참다못한 인구가 그 아이 멱살을 잡았고, 그날로 해고당했다. 18살의 인구가 마주했던 사회는 아주 거칠었고, 도와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이후 일일 학습지 배달과 책 판매 같은 단기 일자리를 전전했다. 인구는 도영에게 입학금 하라며 돈을 건넸다. 다른 중학교에 비해 학비가 1/3 정도 저렴한 시은고등공민학교는 갈 수 있을 거라고, 교과서도 다른 학교랑 똑같으니까 절대 뒤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어디 가서든 공부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도영을 응원했다.

1973년 3월 도영이 시은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반은 여자반과 남자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여자반에는 송림동에서 온 애들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는 독쟁이에서 온 애들이 많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송림동파가 할래? 독쟁이파가 할래? 라고 물으며, 은근한 경쟁을 붙였다. 그럼 도영은 송림동파가 나서서 끝내주게 하겠다며 사기를 북돋웠다. 학교에서 추수감사절에 올릴 연극을 준비할 땐 무대 배경을 손으로 직접 그렸고, 학예회를 할 땐 친구들 앞에 나가 부채춤을 췄다. 도영은 공부뿐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어울리는 학교생활도 아주 즐거워했다.

인구는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다 부평 공동묘지 맞은편 목공소에 취직해 조각 일을 배우게 되었다. 조각칼과 기계는 날카롭고 위험했다. 인구는 세심하고 리더십이 있어 조각반의 반장을 맡았다. 공장에서 일을 마치면 옷을 탈탈 털고 나왔는데도, 집에 도착하면 나무 톱밥이 떨어졌다. 노동의 고단함이 집에 묻어올 때마다 도영은 마음이 쓰였다.

동생 학비와 가족들 생활비 챙기느라 고생하는 오빠가 안쓰러웠다. 사고는 갑자기 닥쳤다. 인구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기계에 손가락이 쓸렸고, 반쯤 잘려 겨우 붙어 있는 왼쪽 두 번째 손가락을 꼭 붙들고 부평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수술로 손가락은 붙였지만 휘어있었다. 구부러지지 않고 뻣뻣했다. 소식을 듣고 남숙이 달려왔다. 인구의 손가락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경수네 식구를 챙기는 동안 자신의 아이들은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심장이 아팠다. 도영은 화가 났다. 누구에게라도 책임을 묻고 싶었지만, 화를 낼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그때 인구의 나이가 열아홉이었다. 냉찜질을 해도 너무 아팠다.

 

도영이 교복입고 찍은 사진
인구가 왼손 검지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해변에서 기타를 쳤다. 인기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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