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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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꿈꾸는 사람들
  • 김희중
  • 승인 2020.08.0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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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김희중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요즈음 나는 좀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1년하고도 육 개월 전부터 동네 꼬맹이들에게 마을의 역사를 가르치는 동아리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리고 오늘, 이 활동의 마지막 행사로 할로윈 데이에 분장을 하고 마을을 한 바퀴 돌기로 한 것이다.

타노스,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 맨을 앞세우고 드라큘라, 피터팬, 해적 실버, 마녀 등으로 분장한 꼬맹이들과 행진을 시작했다. 우리의 리더는 츈 리로 분장하고 일행을 인솔해 가고 나는 행사내용을 알리는 피켓을 들고 뒤를 따라갔다. 꼬맹이들은 구경하는 행인들에게 게릴라식으로 퀴즈풀이를 해 나가며 과자를 나누어 주었다.

퀴즈의 내용은 우리 마을의 역사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 이었다. 주민들 더러는 맞추기도 하지만 대부분 처음 듣는 듯 신기해하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어벤져스의 등장인물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어느덧 어울리지 못하고 어색하기만 했던 나도 차츰 아이들처럼 키득거리고 들뜬 분위기에 묻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이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함께 즐거워하던 얼굴들, 분장하여 알아볼 수는 없지만 행진을 즐기는 꼬맹이들, 동호인들이 눈앞에 한참동안 어른 거렸다.

아내가 딸네 집에 간 요 며칠 동안, 혼자 집을 지키며 한없이 게을러졌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며 오늘도 혼자서 어설픈 저녁을 차려 먹었다. 이 나이를 먹도록 아직도 설거지가 서투르다. 공동체 일에 발벗고 나서면서 그동안 집안 일을 아내에게만 떠넘기며 귀찮아 한 나를 얼핏 돌아본다. 어깨를 으슥 올렸다 내리곤 집을 나선다. 오후 7시의 주민 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새로 건설 중인 아파트 단지 옆의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단독주택으로 들어섰다. 구에서 매입하여 노인정으로 활용하고 있는 20평 남짓 되는 2층 건물이다. 열 두어 평 되어 보이는 앞마당에 조그만 화단도 있어서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지만 아담하니 답답하지는 않았다.

우리 마을에는 스스로를 늘 돈키호테라고 생각하며 사는 분이 계시는데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마을의 일로 가득했다. 마을 주민들의 입에서 정당이니, 선거니 하고 정치 얘기가 나오면 질색을 하고 말리거나 피해버린다. 그리고 시큰둥해진 주변 분위기에 대해서는 당장 우리들 코앞의 마을 일에나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은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도 서로 모르고 사는 삭막한 세상이다. 그의 제안은 소외되기 일쑤였고 귀를 기우려주질 않아서 돈키호테처럼 혼자서 분전하시는 분이다.

나는 그분을 우연히 만났고 그의 생각에 동조하여 기꺼이 산초판자가 되어드리기로 했다. 오늘의 모임은 그분의 제안을 이곳 주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마련한 자리였다.

이 지역의 통장님들, 관심을 가진 젊은 분들도 대여섯 분 참석하여 모두 좌정하자 그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주제는 ‘골목정원 만들기’이다. 어르신들이 설명을 경청하며 질문도 하시고 젊은이들도 꼼꼼하게 따지며 계획에 의견을 보태기도 하였다. 좀 다른 방법으로 골목정원을 만들자는 그의 설명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들 끼리 가진 커피타임에서도 이어졌다.

“이 정원을 만들어 놓고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시작하지 않으니 만 못하다. 이를 유지하가 위하여 마을 어르신들을 동원하자.”는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어차피 골목정원도 공공시설물이 될 것이니 노인인력관리센터와 구청과 연대하여 노인 일자리로 만들자. 이거야말로 소위 일거양득 아닌가?’

침이 마르도록 계속되던 그의 이야기가 아직 귓전에 맴돌고 있다. 혼자 돌아오는 골목길은 어느새 으스스 서늘한 공기가 흘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둠속으로 흩어지지 않고 또록또록 눈을 뜨고 있다.

그는 여러 제안을 내어놓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는 녹색공원이 거의 없다. 먼지와 소음, 그리고 위험으로 가득한 거리를 바꾸자. 전철역으로 이어지는 여러 길을 역사가 살아있는 거리공원으로 만들자. 이제는 사람들의 왕래마저 한산한 재래시장을 재개발하자. 공단을 끼고 있는 마을의 특성상 필수적인 다문화 가족들의 소통마당, 키즈 카페 등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시설을 만들자. 유휴공간을 활용하여 버섯재배를 하자. 쉬면서 무료한 동네 어르신들을 동원하여 이 일을 맡기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의 소출은 동네 식당들에 염가로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잡고…

골목길을 벗어나서 큰길로 나오자 별이 보이는 하늘과 스치는 바람에 소슬한 가을을 느꼈다. 얇은 반코트의 지퍼를 올리며 근래 보기드믄 맑은 하늘의 별들을 헤어봤다. 지난 자치활동가 양성과정의 마지막 날, 수료식 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문을 들어서면서 우리는 ‘자치활동가란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설문지를 받았다. 주저하지 않고 ‘내일을 상상하는 사람’이라고 썼다. 그런데, 교육이 시작된 첫 날 진행자가 모두에게 설문지를 작성하게 한 후, 비교해 보라면서 우리가 제출했던 똑같은 내용의 설문지를 각자에게 돌려주었다. 거기에는 ‘자치활동가’를 ‘중의를 모아서 분석하고 시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 동안의 교육 과정을 통하여 나는 이미 ‘내일을 꿈꾸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빵’ 하는 경적에 놀라 눈앞을 보니 어느새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파란 등이 금방 빨간 등으로 바뀐 것이었다. 거리공원을 가득 메우던 돈키호테도, 춘리도, 꼬맹이들, 어벤져스, 군중들이 모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사람들과 이런 일을 함께 할 수 있게 되다니…’ 하는 생각에 절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내가 씨앗을 심은 화분에서 싹이 하나 올라온 것처럼 뿌듯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어렸을 적, 소풍가는 날 새벽, 어머니가 도시락 준비하시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 설레던 때처럼 기쁘고 흐믓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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