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갯골에서, 무명의 두 배우가...
상태바
비 오는 날 갯골에서, 무명의 두 배우가...
  • 조영옥
  • 승인 2020.08.10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자칼럼] 조영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빨리 하고 갯골 공원에 갑시다” 나는 피곤해서 그냥 쉬고 싶은데 남편은 재촉한다.

“갯골엔 오늘 같이 비 오는 날 가야 좋아. 바람만 불지 않으면…”

“궂은 비 내리는 아침에 무슨 낭만?…” 유행가 가사를 들먹이며 나는 마냥 늦장을 부린다. 남편은 자동차 열쇠를 건네주며 조수석에 딱 자리를 잡고 움쩍도 않으면서 나에게 운전을 하라고 한다. “처음 가는 길도 아니니 찾아서 가봐, “아이들은 바빠서 당신이 필요할 때 불러도 올 수가 없고, 어디 가고 싶으면 휭하니 달려보는 재미도 느껴 보고 살아야지, 또 내가 아프면 당신이 운전을 해서 병원에도 데리고 가야지” 하며 남편은 요즈음 부쩍 운전이 미숙한 나에게 연수를 시키듯 한다. 네비가 알려주는 말도 잘 알아듣고 거리도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며 어디를 가든 먼저 조수석에 올라탄다.

주차장에 몇 대의 자동차만 보이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늘은 검게 내려앉아 사방이 어둑하다.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의 빗방울을 털어내고 투두둑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둔탁하게 들린다. 갈 곳을 잃은 사슴이 길을 잃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듯이 텅 빈 공간에 그와 내가 멈칫하고 서 있다. 바람에 섞여 오는 빗소리가 너무 쓸쓸해서 발길이 선뜻 떼어지지를 않는다. 빗속을 그가 성큼 걸어간다. 뒤쫓아 가야 할지, 그냥 가자고 불러야 할지…

비를 흠뻑 먹은 잔디광장이 초록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다. 마른 땅에 묻혀 있던 씨앗, 며칠 사이 내린 비를 먹고 이제야 싹을 틔었는지 겨우 한 뼘 자랐다. 여린 코스모스, 혹여 밟힐까 조심해서 걸음을 걷는다. 키가 훌쩍 큰 갈대가 빗물 고인 소금밭에 동그라미 그리는 빗방울을 세고 있다. 멀리 보이는 전망대는 올라와서 넓은 세상을 보라고 손짓 한다. 주변이 고요하다. 모든 식물이 탄소동화작용을 멈추고 긴 휴식을 즐기며 하늘에 순응하고 있다. 움푹 파인 갯고랑은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검은 등짝을 들어 내보이고 있다. 기척을 느낀 작은 게들이 숭숭 뚫린 구멍 속에서 나왔다가 기겁을 하고 쏙 들어간다. 움푹 파인 자국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발자국이다. 이 깊은 고랑에 누가 들어갔기에 발자국이 났을까?

파여진 자국들을 보면서 그가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옛날에 비가 오는 밤이면 한 동네에 살던 **네 아버지는 양동이를 들고 갯가로 갔어, 됫병들이 소주병에 석유를 담아 주둥이에 짚을 꽁꽁 쑤셔 넣고 열기에 병 주둥이가 터질까봐 진흙을 꾹꾹 눌러 붙이고 횃불처럼 불을 밝히는 거야, 개펄 바닥에 하얀 사금파리를 깔아 놓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게들이 하나 둘씩 기어 나오는 것이 보여, 그 때 **아버지가 재빨리 집게로 게를 잡아서 통에 넣으면 한 통이 되는 것은 잠깐이야, 나도 한 번 따라 가봤는데 나한테는 잡히지가 않아, 그 **아버지는 집에 와서 몇 시간 눈 붙이고 나서 밤에 잡은 게를 장에 내다 팔곤 했지. 꾸준히 해서 모은 돈으로 논도 사고 밭도 샀어, 그렇게 모은 논밭, 서울에 사는 아들이 우리는 컴퓨터도 잘 모르던 시절에 사업한다고 가져가서 다 날리고, 아마 포도밭 한 뙈기 남았지? 굉장히 근면한 사람들이었는데… 지난 시간들이 빗소리에 젖어들며 빛바랜 활동사진처럼 돌아간다.

그의 이야기에, 밑바닥에 나의 기억들이 머리를 쓰윽 내밀며 올라온다. 나는 무엇에 끌려 저 사람과 인연을 맺었을까? 오늘 같은 날 갯골에 가자고 손목을 끄는 그의 빈 구석에서 따뜻한 품성을 느껴서일까? 빈농의 장남, 형제가 열 두 명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마음을 알아보려고 여섯 명을 보태어 말 했다고 한다. 집에서는 반대를 했다. 철없는 내가 감당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나는 마음의 물길이 통하는 그와 함께 있다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이웃에 살던 친구는 남자가 티브이, 냉장고, 마음에 들 만큼의 패물을 보내야만 결혼을 한다고 똑 부러지게 내게 말했다, 나는 그것이 무에 그리 중할까? 친구의 얼굴을 말가니 쳐다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우산을 하나 접었다. 둘이 함께 쓴다. 그의 어깨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옷이 젖는다.

이십여 년 전부터 심장에 이상이 생겨 몇 번의 시술을 했고 결국에는 혈관 우회수술까지 한 그는 삼년 전에 다시 문제가 생겨 이번에는 집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유서까지 써 놓고 집을 나섰다. 그래서인가? “사람은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게 되어 있어, 부부도 마찬가지야, 그게 세상의 이치지, 혹시라도 내가 먼저 가게 되면 당신, 아이들에게 눈물 보이지 말고 의연히 버텨, 나는 아무런 미련이 없어, 단지 당신을 고생시켜서 그게 안쓰럽고 마음에 걸릴 뿐이야“ 남편은 가끔 내 손을 잡으며 마음의 준비도 연습을 시키듯이 담담히 말을 한다.

“무슨 그런 말을…”, 나는 발길을 멈추고 섰다. “나 이제,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둥그레진 눈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본다.

비 오는 들판에서 무명의 두 배우가 인생의 중요한 장면을 관객도 없이 연극대사를 연습하듯 리허설을 한다 “그냥 가는 거야, 오늘처럼 내일도, 아무도 모르는 그 길…” “더 이상 말하지 말어” 오늘 같은 날 애호박 채쳐서 호박전이나 부치고 OST 노래나 들으며 집에 있을 걸… 헛헛해진 마음을 달래며 갯벌을 바라본다. 저어새 두 마리 사랑을 나누다 먹이를 찾느라 주둥이를 게구멍에 박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