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를 먹는 마음으로 세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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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를 먹는 마음으로 세수하자
  • 최병관
  • 승인 2020.08.17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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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최병관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내가 태어나던 같은 해 동네에 동갑짜리가 아홉 명이 출생했다. 다섯 살 때 홍역이 돌자 어머니는 여덟 명이나 되는 친구들 목숨을 앗아가는 큰 재앙 가운데서도 오직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매일 이웃 동네에 몰래 숨어들어 물을 길어다 끼니를 끓이고 나를 씻기어 살리셨다. 이 일화는 지금도 인근 동리 어른들 사이에 회자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지극한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 내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나서야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 나는 불효자식임이 틀림없다.

한 번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학교가 멀어 외지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방학 때면 집에 돌아와 고향의 정에 푹 빠져 지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생일 파티를 해 준다는 친구들의 제안에 부모님께 미처 말씀을 못 드리고 집을 나섰다. 나는 깜깜한 밤에 친구들과 어울려 횃불을 들고 시냇가로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돌아오는 길에 남의 밭에 들어가 애호박과 풋고추까지 따가지고 한적하고 외딴 친구 집에서 얼큰한 매운탕을 끓였다. 소주잔까지 곁들여 노래 부르고 춤추며 밤 세워 거나하게 놀았다.

다음날 해가 중천이 돼서야 집에 돌아와 우물에서 씻고 있는 나를 보신 아버지께서 기다렸다는 듯 “병관아”하고 부르시더니 “비누로 세수만 하지 말고 먹어라.” 하시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했는데, 이어서 말씀 하시기를 “사람이면 평소 마음이 깨끗하여 얼굴이 부끄럽지 않게 하고 다녀야지 속(마음)은 숯검정인데 얼굴만 강아지 죽사발 핥은 것 모양 겉만 번지르르해서야 어디에 쓰겠느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서야 어젯밤 일이 생각나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데 거듭 하시는 말씀이 “세상에서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고, 더 어려운 사람은 자기 잘못을 알면서도 시인을 안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시며 “내 말 잘 새겨 듣거라!”이르고는 자리를 뜨셨다. 아버지는 평소 학생이면 학생답게 어른이면 어른답게 분수에 맞는 언행을 해야 한다고 이르셨다. 특히 자신을 속이지말 것을 늘 주문 하셨던 지라 구체적인 말씀은 없었지만 백 마디의 훈계보다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 일이 있고나서 아버지께서 나를 많이 사랑하고 걱정 하신다는 믿음이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 말씀에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 또 조심하게 되었다. 특별히 흡족한 효도는 못했지만 외출할 때는 “잘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와서는 “잘 다녀왔습니다.” 인사하는 법을 잊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부모님 말씀 따라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바로 인정 하고 고쳐나갈 수 있었으니 동료나 선후배는 물론 지인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엄부자친(嚴父慈親)이라 하여 아버지는 엄격하여 사람의 법도를 잘 지키도록 가르쳐 주셨고 반대로 어머니는 서로 정붙여 살게 사랑으로 보듬어 주셨다. 유교식 훈육을 받으며 성장한 나이지만 자식을 키우다보니 아버지 어머니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깨우칠 때마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둘째가 4학년이었는데 마침 학교에서 가훈 전시회를 한다기에 이 때다 싶어 평소 마음에 담고 있던 ‘비누로 세수만하지 말고 먹으라.’시던 아버지의 말씀을 상기시켜 ‘비누를 먹는 마음으로 세수하자’ 라고, 가훈을 만들어 보냈다. 생각지도 못했지만 ‘최우수’라는 상까지 받게 되어 나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다. 그 뒤로 우리 집 가훈은 ‘비누를 먹는 마음으로 세수하자’가 되었다.

지금도 명절 때나 아버지 어머니 기일 때면 두 분의 생전의 삶이 자연스럽게 화두가 되기도 하지만 두 분의 생전의 삶이 우리들 피 속에 녹아 흐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한 번은 집 사람이 병원에서 요양 중일 때 일이다. 옥상에 하늘 정원이라는 조그만 쉼터가 있었는데 아담하게 꾸며진 정원 한쪽에 단풍나무 분재가 있었고 나무 주위에 예쁜 조약돌이 둘러져 있었다. 여섯 살 큰 손자와 네 살 작은 손자가 주위에서 함께 놀았다.

한참을 토닥거리며 재미있게 놀더니 동생이 조약돌 몇 개를 주어 집에 가져가겠다는 것 아닌가. 그런 동생을 보고 그것은 네 것이 아니니 절대로 가져가면 안 되는 것이라고 끝까지 설득하여 제 자리에 두고 오게 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정말 피는 못 속이는가보다 싶었다. 아무튼 부모님 혼이 담긴 귀한 말씀을 가훈에 담았으니 가족들이 그 말씀으로 결속하고 계속해서 대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지금도 가끔 고향에 들리게 되면 동네 어른들께서 “자네는 백두산 꼭대기에 혼자 데려다 놓았어도 살 사람이었어.” 라고 말을 건네는 것이 나에 대한 인사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그 크신 사랑과 희생이 아니었으면 불가했음을 알기에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시울이 뜨겁다. 그러나 감사하는 일이 많아서 참 행복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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