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동 여자들 사이에 소문난 위험한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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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동 여자들 사이에 소문난 위험한 골목길
  • 권근영
  • 승인 2020.08.19 0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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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17) 송림1동 181번지에 처음 전화기를 들여놓은 이유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1976년 2월 남숙의 딸 도영은 시은고등공민학교를 졸업했다. 3년 동안 국어, 사회, 산수, 자연, 체육, 미술 등의 수업을 듣고, 외국어도 배웠다. 일반 중학교 교과목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방과 후 활동은 연극을 했다. 공연을 준비하게 되었을 때는 무대 배경을 직접 그림으로 그렸다. 연극의 제목은 <솔로몬의 지혜>였는데, 아이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아이를 둘로 나눠 가지라는 솔로몬이 내리는 판결이었다.

장면을 상상하며 무대 배경을 꾸몄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멋지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도영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매우 행복했다. 공부하는 것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아주 좋았다. 고등학교에 가서 학업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시은고등공민학교는 공식적인 학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고입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한다해도, 형편이 좋지 않아 학업을 지속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집에는 아직 초등학생인 상규와 이혼 후 송림동 집에 얹혀살고 있는 삼촌 경수네 식구들이 있었다. 아버지 형우는 육십이 넘었고, 어머니 남숙도 오십이 넘은 나이였다. 없는 살림에 식구들은 많아, 취업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이 다가왔다. 수도국산 달동네 영복이 엄마가 공장을 하나 소개했다. 크라운이라는 라이터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집에서 놀면 뭐 하냐고,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지 않겠냐는 남의 속 모르는 참견이 듣기 싫었지만, 도영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라이터 공장은 자주 철야 근무를 했다. 아침 9시에 출근했는데 야근을 하고, 다음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경우가 잦았다. 잠을 규칙적으로 못 자니까 멍해 있는 날이 많았다. 코피를 자주 쏟았고, 버스에서는 매번 꾸벅꾸벅 졸았다. 한 번은 야근을 마치고 아침에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눈을 떠보니 버스 종점에 도착해 있었다. 차고지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며 또 차비를 냈다. 이번에는 절대 졸지 말아야지 했는데, 또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차에서 겨우 내려 송림동 집으로 걸어가는데, 너무 속이 상했다. 이때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새로 면접을 보게 된 회사는 부평에 있는 대한마이크로였다. 직원이 3,000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월급이 더 많았다. 지원신청 요건은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지닌 신체 건강한 사람’이었다. 도영은 고등공민학교 졸업생도 가능하냐고 문의했다. 중학교와 마찬가지로 3년을 배우고, 졸업증이 있으니 면접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달라고 요청했다. 회사에서는 면접과 신체검사를 잘 준비해오라고 답했다. 도영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도영은 영어 면접을 준비했다. 대한마이크로는 미국과 텔렉스(TELEX - 전화의 자동 교환과 인쇄 전신의 기술을 이용한 기록 통신 방식)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영어 면접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은고등공민학교에 다닐 때 영어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선생님은 먼저 한글로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써오면, 영어로 문장을 다듬어 준다고 했다. 도영은 영어로 된 자기소개를 달달 외웠다. 미국 사람들은 이름을 먼저 말하고, 뒤에 성을 붙인다던 말을 기억하며 마이 네임 이즈, 도영 킴. 마이 컨츄리 이즈. 마이 패밀리 하며 영어로 소개를 마쳤다.

면접은 합격했는데, 문제는 신체검사였다. 미국과 교신을 하고, 3교대로 일을 하려면 신체가 건강해야 하는데 빈혈 수치가 너무 높아서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도영은 자신이 젊기 때문에 일을 잘 할 수 있고, 금방 건강해질 수 있다며 매달렸다. 회사에서는 철분제를 꾸준히 먹고, 건강해지는 걸 조건으로 입사를 허락했다.

 

서부교회가 보이는 배경으로 도영과 동네 아이들
서부교회가 보이는 배경으로 도영과 동네 아이들

 

대한마이크로 회사 안에는 출출할 때 군것질 할 수 있는 잡화점이 있었다. 그 옆에 스타킹 파는 비너스 가게가 있었고, 아모레 화장품 가게도 있었다. 화장품 가게에서는 가끔 회사 직원을 모델로 앉혀놓고 화장을 해주는 시연을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동료 직원을 따라 화장품을 구경하러 갔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도영을 불렀다. 피부가 하얗고 눈이 크니까 눈화장을 하면 정말 예쁠 거라고 말하며, 시연 모델이 되어 달라고 했다. 도영은 의자에 앉았다. 로션 말고는 발라본 적 없는 피부에 색색의 컬러와 브러쉬가 얼굴을 간지럽혔다. 입술에도 붉게 색을 넣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화장이었다.

회사 동료가 도영에게 예쁘다며, 앞으로도 화장해볼 것을 권했다. 도영은 화장품을 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은 양키시장에 가서 코티분을 사고, 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신포시장에서 맛있는 튀김과 만두를 사 먹기도 했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월급을 받으면 고스란히 남숙에게 주고, 차비만 겨우 받아 생활해왔다. 가난한 생활에 화장품은 사치라는 생각을 했던 때다.

낮 근무로 2시에 일을 시작해서 밤 10시에 끝나는 날이었다. 부평에서 버스를 타고 송림동에 내려서 수도국산 언덕을 올라가는데 등 뒤가 스산했다. 큰길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서부교회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길 중간에 튀각 집이 있어 튀각 골목으로도 불렸다. 이 길은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동네 여자들에게는 조심하라고 소문이 난 곳이었다. 방앗간에 다녀온 동네 여자가 대야를 머리에 이고 골목으로 지나가는데 앞에서 다가와 가슴을 만지고 도망갔다는 이야기, 골목길 한가운데를 버티고 서 있다가 행패를 부렸다는 소문들이 여자들 사이에 파다했다.

온갖 무서운 소문들이 도는 그 골목을 걸어가는데 심장이 마구 떨렸다. 가방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가방을 홱 잡아당겼다. 도영은 재빨리 가방끈을 붙잡았다. 그날, 가방 안에는 월급봉투와 보너스 봉투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가족의 한 달 치 생활비였다. 절대 뺏기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소리를 지르고 힘을 주었더니, 온몸에 주먹질해댔다. 강도는 가방을 뺏어 달아났고, 도영이 내 가방, 내 가방 하며 울부짖으며, 떨리는 두 발로 쫓기 시작했다. 도둑은 저 멀리 달아나 보이지 않았다. 더 쫓을 수도,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망연자실해져 걸어가는데, 아~ 공터에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로 아이보리색 크로스 백이 보였다. 도영은 멀리서도 자신의 가방을 한눈에 알아봤다.

한 남자가 도영의 가방끈을 꼭 붙잡고는 고통스럽게 웅크려 누워있었다. 도영은 그 옆에서 남자를 살피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남자는 도영의 비명을 들었고, 강도로 보이는 남자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방을 빼앗았다고 했다. 소란스러움을 느낀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자 강도는 남자의 명치를 걷어차고 달아났다. 남자는 숨을 고르던 차였다. 무리에서 한 사람이 도영을 알아봤다. 늦은 시간에 왜 혼자 다니냐며 도영을 나무랐다. 남자는 끊어진 가방끈을 돌돌 말아 도영에게 건넸다. 잘 들고 조심히 들어가라고 했다. 도영은 자신의 집이 가까우니 모셔서 사례를 하겠다고 제안했는데, 거절했다.

정신이 새하얘진 채로 집에 도착했다. 좁은 방 하나에 가족들이 모여 자고 있었다. 도영은 늦은 시간에 일을 마치고 오면서 험한 일을 당했는데, 세상모르고 곤히 자는 식구들의 얼굴이 너무 미웠다. 그 편안한 얼굴을 보자 억울해져 눈물이 났다.

다음날 도영은 회사에 가서 조합장님에게 퇴직금을 담보로 대출을 해달라고 했다. 집에 전화기를 놓기 위해서다. 정부에서 발행하는 채권을 사야 전화기를 놓을 수 있던 때라 돈이 꽤 많이 들었다. 도영은 그 돈을 감수하고서라도 전화기를 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때 송림1동 181번지에 전화기가 처음 생기게 되었다.

도영이 밤 10시에 일이 끝나는 날이면, 남숙네 전화벨이 울렸다. 버스에서 내린 도영이 송림동 복음병원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거는 전화다. 버스에서 내렸다고 말하면, 오빠 인구나 아빠 형우가 마중을 나왔다. 도영은 이제 서부교회 옆 튀각 골목이 무섭지 않았다.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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