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젓 한 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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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젓 한 종지
  • 윤희자
  • 승인 2020.08.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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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윤희자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허리 디스크 시술로 수술실로 내려간 남편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길고 긴 한 시간. 드디어 침대에 누운 채 남편이 돌아왔다. 잠시 후 수술을 집도한 원장님이 시술은 깨끗이 잘 되었다며 환하게 웃으며 걱정 마시라고 내 등을 두드리고 내려가셨다. 극도의 초조와 불안이 가라앉는다.

“배고파, 아파”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남편이 비몽사몽 중에 하는 말이다. 배고파,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듯 하는 말이 가슴에 전기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중매로 만난 스물다섯 새댁과 스물여덟 신랑이 아직 내외하던 때다. 입이 무거운 신랑이 어색하고 부끄러운 표정으로

“나는 어려서 배를 많이 곯았어요. 작은 농사가 아닌데 식구가 많았어. 3대가 한 집에 살았어요. 그래서인지 밥시간이 지나면 몹시 허기가 져요”

어린 나이에 배를 곯다니! 나의 유년은 풍족하진 않았어도 삼시세끼 거를 형편은 아니었다. 신랑의 그 말에 측은한 마음이 왈칵 솟아 부끄러움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신랑과 새댁의 내외하는 어색함이 그렇게 한 겹 벗겨지고 또 걷어졌다.

잠든 남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간신히 민머리를 면한 이마, 백발, 미간과 이마에 굵은 주름, 듬성듬성 돋아난 검버섯, 쳐진 눈가로 어둑한 피로가 지나간다. 비몽사몽 중 ‘배고파’ 하는 말이 새댁 때 ‘배를 곯았어요’ 하던 말과 겹쳐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감정으로 남편의 손을 가만히 잡는다. 기억이 또 다른 기억을 불러온다.

‘이 남자를 평생 행복하게 해줄 거야’

세 잎 크로버도 아니고 그리 쉽게 행복을 장담하다니, 철 없었지만 20대의 내 순수에 빙긋 웃음이 돈다. 국어사전에서 ‘행복은 마음에 차지 않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어 기쁘고 넉넉하고 푸근함’이라고 쓰여 있다. 옛 어른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십중팔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배부르고 등 따시고 우환 없으면 상팔자여”

이렇게 버럭 하실게 분명하다. 딴은 그렇지,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중년 한 때 견디기 힘든 시련과 맞닥뜨렸다. 이태에 걸친 대형 태풍으로 비닐하우스가 몽땅 주저앉아 다시 일어서는데 몇 해, 몸 고생 마음 고생,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힘들고 괴롭다.

두부 한 냄비 끓여놓고 식구들과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옆집 구멍가게 아주머니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고향이 바닷가여서 비린 것이 몹시 생각나면 새우젓 한 종지 놓고

“이건 벤댕이 구이야, 동어구이야”

하며 비위를 다스렸다.

새우젓으로 간간하게 간을 한 두부찌개를 끓이면서 가끔 우리 이제 살만해 졌다는 생각을 한다. 친정어머니께서 밴댕이나 동어에 굵은 소금을 훌훌 뿌려 화롯불에 석쇠를 얹어 구어 주시던 생선을 식탁에 올리면서도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고기반찬이나 회 접시를 상에 올릴 때 잠잠하던 기억이 왜일까. 더 내려 갈 곳이 없던 시절의 부작용인가. 부작용? 생각하기 나름으로 순 작용일 런지도. 과거 생각 못하고 분수에 넘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드물지 않아 드는 생각이다.

새파랗게 젊은 날 맹난자 선생은 존경하는 은사님과 법정스님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때 은사님이 맹난자의 취직을 부탁드렸고 대한 불교 신문사에 취직이 되었다고 한다. 맹난자 선생의 첫 수필집이 출간되었을 때 법정스님께서

“가난이 우리를 이만큼 키웠습니다”

라고 쓴 엽서를 보내주셨다며 가난한 자신을 편드느라 ‘우리를’이라고 덧붙이셨다고 감동한다. 우리 부부 인생 후반을 수굿하게 지내는 것은 때때로 새우젓 한 종지를 떠올림이 아닐까. 힘든 날들이 떠나면서 선물처럼 작은 종지 하나 남겨, 넘치려 할 때, 옆길을 넘볼 때 데~엥 경종을 울려 마음을 다잡는다.

언제부턴가 남편과 나는 서로 어깨를 펴라, 허리를 펴고 다리에 힘을 주고 걸어라, 반찬 좀 흘리지 마라, 날마다 똑같은 타박을 한다. 어린 날 어머니로부터 듣던 귀한 꾸중으로 들리는 것은 나이 탓인가. 시력이 약해지듯 요즘 갑자기 청력이 약해져서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묻곤 한다. 핸드폰도 리모컨도 늘 찾는다. 한쪽은 밝고 한쪽은 어두웠다면 불균형으로 티격태격 했겠지.

남편의 기운 어깨를 보면서 차면 기운다는 생각에 잠긴다. 가득차서 평생 어깨에 각을 잡아본 적도 없는데 어느덧 기웃한 어깨위에 내려앉은 회한과 쓸쓸함을 본다.

남편은 5일 후 퇴원이다. 생전 처음 병원에 입원한 남편, 디스크 시술은 깨끗하게 잘 되었다는 주치의 선생님 말씀에도 의기소침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허리에 좋다는 음식을 두루 알아보고 환자의 입맛에 맞추는 일이다. 남편은 죽 한 그릇을 비운 후 다시 잠에 들었다. 침대 옆에 앉아 핸드폰을 열고 허리 디스크에 좋다는 음식을 클릭한다.

표고버섯, 더덕, 호두, 토마토, 브로콜리, 도가니탕 등등. 가까운 모래네 시장에서 쉽게 구할 음식 재료들이니 다행이다.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잘 해내야지 전의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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