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관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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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관념의 의미
  • 김선
  • 승인 2020.10.13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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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당과 고전읽기 도전하기]
(2)이방인-㉗어제 혹은 내일

인천in이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서유당과 함께 어렵게만 느껴지던 동·서양의 고전 읽기에 도전합니다. ‘서유당의 고전읽기모임인 하이델베르크모임Jacob 김선(춤추는 철학자), 김현(사회복지사), 최윤지(도서편집자), 서정혜(의류디자이너), 소순길(목사), 이광남(칼럼니스트)’ 등이 원서와 함께 번역본을 읽어 내려가며 삶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고전읽기- 알베르 카뮈(김화영 역), 이방인 L’Etranger, 민음사.

: Jacob 김 선

 

Les mots hier ou demain étaient les seuls qui gardaient un sens pour moi.

어제 혹은 내일 같은 말만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뫼르소는 자신의 재산 목록의 골자를 빠짐없이 파악해서 온전한 열람표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온통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몇 주일 후 뫼르소는 방 안에 있는 것들을 열거해 보는 것만으로도 여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뫼르소는 3차원 방안에서 4차원 시간을 되돌리는 중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뫼르소는 등한히 했던 것, 잊어버렸던 것들을 기억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생각의 타임머신이 뫼르소에게는 킬링 타임머신인 것이다. 뫼르소는 바깥세상에서 단 하루를 살았을 뿐인 사람도 감옥에서 백 년쯤은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뫼르소를 보니 시간이 현자를 낳는 것 같다.

  뫼르소에게는 잠도 고통거리였다. 누구나처럼 뫼르소도 처음에는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고 더군다나 낮에는 조금도 잘 수가 없었다.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 수개월 동안은 하루에 열여섯 시간 내지 열여덟 시간씩 잤다고 뫼르소는 말했다. 너무 변했다. 남는 여섯 시간만 보내면 되었는데 그것은 식사며 대소변이며 추억들이며 체코슬로바키아의 이야기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는 시간을 보내는 일이 몇 가지로 시스템화 된 것이다.

  밀짚을 넣은 매트와 침대 판자 사이에서 뫼르소는 옛 신문 한 조각을 발견했던 것이다. 천에 거의 들러붙어서 노랗게 빛이 바래고 앞뒤가 비쳐 보였다. 첫 대목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듯한 잡보 기사가 실려 있었다.

어떤 남자가 체코의 어떤 마을을 떠나 돈벌이를 하러 나갔다가 이십오 년 후에 부자가 되어 아내와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누이와 함께 고향 마을에서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들을 놀래 주려고 사내는 처자를 다른 여관에 남겨 두고 어머니의 집으로 갔는데 그가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장난삼아 방을 하나 잡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기가 지닌 돈을 보였다. 밤중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는 그를 망치로 때려 죽이고 돈을 훔친 다음 시체를 강물 속에 던져 버렸다. 아침이 되자 사내의 아내가 찾아와서 영문도 모른 채 여행자의 신분을 밝히게 되었다. 어머니는 목을 맸다. 누이는 우물 속에 몸을 던졌다.

 

Franz Kafka(1883.7.3 ~ 1924.6.3)
Franz Kafka(1883.7.3 ~ 1924.6.3)

 

  체코 이야기의 어머니와 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면 체코 최고의 이야기 꾼인 카프카는 <유형지에서> 나오는 특이한 형벌장치인 사형기기로 그들을 벌하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였다면 뫼르소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뫼르소는 그 이야기를 아마 수천 번은 읽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또 한편으로는 그럴 법도 한 이야기였다. 그런 것이 진짜 소설이다. 어쨌든 뫼르소가 볼 때 그런 결과에 대해서는 여행자에게도 책임이 좀 있으며 절대로 장난을 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의 장난이 뫼르소를 장난 아니게 만들었다. 잠을 자고 지나간 일을 되살려 보고 잡보 기사를 읽는 동안 빛과 어둠이 갈아들면서 시간은 흘렀다. 그렇게 시간은 장난처럼 지나간다. 감옥에 있으면 시간관념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뫼르소는 분명히 읽은 일이 있었다. 읽지 않았어도 몸으로 체득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의식은 무감각해질 것이다. 그때는 그러한 것이 뫼르소에게 별로 의미가 없었다. 의미의 상실이 동반되고 있다. 시간 관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쓸수록 그런 자신의 모습 어디에서도 의미를 부여하기는 더욱 힘들 뿐이었을 것이다. 한나절이 얼마나 길면서도 동시에 짧을 수가 있는 것인지 뫼르소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굳이 깨달을 것도 없긴하다. 지내려면 물론 길게 느껴지지만 날들이 어찌나 길게 늘어지는지 하루가 다른 하루로 넘쳐 나서 경계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시간이 시간을 물고 늘리고 계속이다. 하루하루는 그리하여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어제 혹은 내일 같은 말만이 뫼르소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라도 시간 관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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