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했던 수재, 운동권 한복판 삶을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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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했던 수재, 운동권 한복판 삶을 살다
  • 윤성문 기자
  • 승인 2020.11.03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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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이 만난 사람]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제물포고 1등 놓치지 않았던 수재... 동양사학과로 전과한 후 삶 바뀌어
78년 서울대 시위, 87년 인천 5·3민주항쟁 주도하며 세번의 옥고 치러
'인천민주화운동사' 편찬위원장 맡아 '열전-18인의 인천민주화운동가' 출간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삶 선택할 것...철학, 수학 더 공부하고 싶어"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인천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인천 5·3민주항쟁’이 일었던 곳이다. 당시 수많은 청년의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화의 등불이 밝혀졌다. 인천의 대표적인 운동권 '투사'로 꼽히는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역시 이들 중 하나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5·3민주항쟁'을 비롯한 숱한 격동의 현장에 있었고, 이 과정에서 세 번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2009년 인문학 서당 ‘온고재’를 열어 동양 고전을 가르치며 지내던 그는 2017년 ‘인천민주화운동사’와 ‘열전-18인의 인천민주화운동가’의 편찬위원장을 맡았다. 적잖은 산고 끝에 지난해 말 '인천민주화운동사'가 완성됐고, 최근 '열전-18인의 인천민주화운동가'도 발간됐다. 지난 5월에는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의 이사장을 맡았다. 희미해져 가는 인천의 운동사를 기억하고, 과거의 운동권과 현재의 시민운동을 잇는 고리 역할을 자임하겠다는 의지에서다.

미추홀구 문화컨텐츠산업지원센터에 있는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사무실에서 [인천in]과 만난 이 이사장은 꿈 많았던 청년 시절부터 격동의 운동권 시절, 운동권 분열로 인한 좌절의 시기, 최근의 생활까지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놨다.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이 편찬위원장을 맡아 최근 펴낸 '열전, 18인의 인천 민주화운동가'

57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그는 4살 때 인천으로 건너왔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직업군인인 아버지 덕분에 궁핍하진 않은 삶이었다. 제물포고 재학 시절에는 3년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해 '인천의 수재'로 불리기도 했다. 수학과 물리학은 그의 주특기였다. 전국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는 눈에 띄는 성적을 거뒀다.

“당시에는 경기고등학교가 모든 경시대회를 휩쓸던 시절인데, 4등를 제외하고 1등부터 10등까지 전부 경기고 학생들이 차지했어요. 그 4등이 저였어요. 나중에 제가 문과반인 것을 알고는 그쪽에서 엄청 자존심 상해하더라고요”

75년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해선 판·검사가 되기 위해 고시 공부를 했다. 당시에는 판·검사가 가장 출세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했던 그에게 고시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당시 마오쩌둥 등 중국 근대사 인물들이 사망했는데,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연히 동양사개론 강의를 듣게됐고, 흥미를 느껴 동양사학과로 전과를 했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온 순간이었다.

“당시에 한 친구가 문건 하나를 건내줬는데, 운동권과 관련된 내용이었어요. 중1때 군에서 전역한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가난을 겪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 기억이 막 떠오르면서 갑자기 운동권에 빠져들게 됐어요. 이게 내가 가야할 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후 본격적인 운동권 생활에 접어든 그는 78년 6월 유신반대 학내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긴급조치 9호 시대에는 데모를 주도하면 인생을 걸어야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해 9월 열린 학내시위도 주도했다. 결국 같은 해 10월 첫번째 구속이 됐다. 80년 8월에는 인천에서 신군부의 만행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또 다시 구속됐다.

이우재 이사장이 주도했던 1978년 6월13일 서울대 학내 시위를 보도한 일본 아사히신문 지면. 아사이신문은 '서울대 1천명 데모, 삐라를 뿌리다'라는 제목으로 시위를 보도했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3년에는 부정부패 특권정치 청산 등을 목표로 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설립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7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김근태 등 학생들이 중심으로 설립한 단체였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인천에도 이런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서울이 아닌 인천에서 활동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당시 인천은 정치 중심지인 서울에 가서 시위를 하는 등 서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어요. 이젠 인천에도 서울과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 뒤로 근태형에게 이제 인천에서 활동하겠다고 말하고, 인천만의 단체를 만들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죠”

그는 다음해인 84년 11월 제정구, 이호웅 등과 함께 인천지역 최초의 민주화운동 단체인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을 출범시켰다. 비로소 인천에 기반을 둔 인천의 민주화운동이 자기정체성을 갖게된 순간이었다. 인사연은 85년 3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출범하면서 민통련의 지역 단체로 가입해 전국의 민주화운동과 흐름을 같이해 왔다. 

이후 86년 5월3일 열린 인천 5·3민주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당시 제1야당이던 신한민주당의 ‘헌법개정추진 인천·경기지부결성대회’에 1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였다. 이에 경찰이 대대적인 진압을 벌였고, 당일에만 319명이 연행됐다. 그는 당시 잡히지 않았지만, 도피 생활을 전전하다가 88년 3번째 수감생활을 했다.

“지금 잡혀가면 평생 반병신으로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때 도망을 가고 지명수배가 됐죠. 나중에는 집사람도 나와서 월세방을 전전하며 살기도 했어요. 85년에 결혼해서 한창 신혼이었는데, 집사람에게 고맙고 미안하죠”

86년 인천 5·3민주항쟁 현장. 사진=인천민주화운동센터
1986년 인천 5·3민주항쟁 현장 (사진=인천민주화운동센터)

이 시기는 그에게 시련의 연속으로 기억된다. 민주화운동 진영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사연은 겨우 사무실이나 유지하는 상태였고, 운동권은 선거 때마다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분열했다.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이 시기에 더 이상 타도의 전선이 아닌 정치에 참여해서 잘못된 점을 함께 고쳐나가자는 새로운 시민운동이 시작됐어요. 하지만 기존 운동권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어요. 오랫동안 화염병과 돌을 던지면서 거세게 저항하던 시대에 살았으니까요. 결국 인사연도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자진 해산 절차를 밟게되죠”

그는 상실감과 허무함으로 몇 년 동안 방황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했다. 매일 술을 마시면서 집에만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집 한켠에 있던 ‘논어’를 읽게 됐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자는 세상에서 한번도 제대로 쓰임다운 쓰임을 얻지 못했어요. 그저 집에 앉아 책이나 읽고, 그러다 벗이 찾아오면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하면서 지냈어요. 성인인 공자조차 타인이 알아주지 않음에 개의치 않았는데, 나는 언제까지 세상을 원망하고 스스로를 학대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그 뒤로 공자만큼은 못되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보자고 다짐하게 됐죠”

이때부터 독학으로 고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논어를 읽은 뒤에는 맹자도 읽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음이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공자와 맹자 관련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지난 2009년에는 남동구 구월동에 인문학 서당 ‘온고재’를 열었다. 이름은 ‘옛 것에서 새로움을 찾는다’는 뜻의 ‘온고지신’이라는 논어의 글귀에서 따왔다.

2011년 인문학 서당 '온고재'에서 강의중인 이우재
2011년 인문학 서당 '온고재'에서 강의중인 이우재 이사장

이후 온고재에서 고전 강의를 하며 지냈고, 2018년에는 인천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정리한 ‘인천민주화운동사’와 ‘열전-18인의 인천민주화운동가’의 편찬위원장을 맡아 두 책을 펴냈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쟁취됐는지 인천의 미래 주역인 청년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올해 5월에는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9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기존 운동권과 새롭게 등장한 시민운동, 그리고 지금의 젊은 세대까지 이어지는 이 흐름을 연결하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인천민주화운동사와 열전의 편찬을 맡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죠. 가장 큰 목표는 임기 안에 민주화운동기념관의 첫 삽을 뜨는 것이에요”

이사장 임기가 끝나면 그는 다시 온고재의 ‘훈장’님으로 돌아간다. 그에게 고전 공부와 시민운동은 같은 의미로 통한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잘살기 위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운동권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진 않아요.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거에요. 다만 인생을 고찰하는 철학 공부를 좀 더 깊게 해보고 싶긴 해요. 좋아했던 수학과 물리학도 다시 해보고 싶고요. 지금은 머리가 안돼서 못해요. 이사장 임기가 끝나면 온고재에서 공부하고 성찰하면서 술 한잔 기울이는, 그런 삶을 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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