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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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화두
  • 정민나
  • 승인 2020.11.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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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아내의 자전거 배우기 - 엄동훈

 

아내의 자전거 배우기

                                   - 엄동훈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두 개의 굴렁쇠가

거나하신 할아버지 같이 휘청휘청 한다

혼쭐나는 남편

배우려는 아내

짐받이 붙잡고 뒤뚱뒤뚱

겁이 많은 것인가

엉덩이가 무거운 건가

진도가 영 안 나간다

남편은 남의 편이라더니

내편 맞아?

오늘도 눈총에 여러 번 죽는다

어제와 매양 같은데

“조금 좋아졌어” 말하지만

여전히 휘청휘청

여보 놓지마!

잡고 있지? 말하던 아내

어느 순간 저 혼자 멀리간다

내가 손을 놓자마자

아내는

훨훨 가벼워졌다

 

88올림픽 때 최고의 아이콘은 ‘굴렁쇠 소년’이었다. 당시 개막식 총책임자였던 이어령 선생님이 굴렁쇠 소년을 기획했는데 천진난만한 소년이 나와서 관중들이 숨죽이고 바라보는 한가운데 굴렁쇠를 굴렸다. 수많은 시선이 집중한 그 큰 운동장을 도는 동안 굴렁쇠가 멈추면 어쩌나 하고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았다.

놀이감이 많지 않던 옛날에는 아이들이 굴렁쇠를 굴리며 놀았다. 굴렁쇠는 쇠붙이나 대나무로 만든 그저 둥근 테일뿐인데 그것이 일직선 위를 굴러갈 때는 마음이 조마조마 하면서도 재미있는 놀이였다. 이 시는 남편이 아내의 자전거 타기 연습을 도우면서 갖게 된 느낌을 형상화한 것이다. 작품 속 균형을 못 잡고 휘청거리는 등장인물에게서 88올림픽 개막식 때 어린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을 돌던 장면이 연상되면서 그 느낌이 살아났다. 시적 화자는 배우자인 아내가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을 굴렁쇠 굴리던 것에 비유한다. 자칫 균형을 잘못 잡으면 삐끗! 다른 곳으로 굴러가거나 잘 굴러가지 않고 멈춰버리는 굴렁쇠는 그만큼 예민한 물건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든 처음 하는 일은 손에 잘 잡히지 않고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전거를 배우는 아내 역시 남편에게는 휘청거리는 짐받이 같은 사람이고 진도가 잘 안 나가는 숙제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아내도 아내를 돕는 남편도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집안에서 살림을 하며 살아온 아내는 겁이 많고 몸도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지만 무언가를 배우려는 의욕은 아직 살아있다. 그런 아내를 남편이 뒤에서 받혀주고 있는 것이다.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 ‘아녀자’인데 ‘감히 아녀자가 나서긴 어딜 나서!’, ‘장부가 길 떠나는 데에 아녀자가 눈물을 보이는 법이 아니다.’와 같이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해도 여자의 이미지는 ‘아녀자’에 가까웠고 남성은 ‘장부’라는 이미지가 대세였던 시기였다. 그 어머니 세대와 많이 동떨어지지 않은 화자의 아내는 그래서일까? “여보 놓지마, 잡고 있지”하고 재차 물으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자신의 두려움을 드러낸다. 여전히 남편에게 의지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배우려는 자세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아내가 혼자 탈 수 있을 때까지 남편이 아내 뒤를 든든히 잡고 있다는 믿음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남편은 손을 뗀다. 손을 놓자마자 아내와 남편 모두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독자인 필자 역시 마음이 후련해진다. 이 때 필자의 머리 속으로 ‘윈윈’, ‘상생’이라는 단어가 휘익! 지나간다. 이어령 선생님은 ‘굴렁쇠 소년 기획’에 대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딱 한번 밖에는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벤트는 아름답고 절실하다.”

자유라는 화두는 새로움의 아이콘이었던 굴렁쇠 소년이요. 받혀주는 손을 놓자마자 저 홀로 멀리 달려가는 자전거 아내가 아닐까.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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