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동 집에서 치른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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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동 집에서 치른 장례
  • 권근영
  • 승인 2020.11.1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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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22) 남숙의 엄마 기돌례의 죽음
1979년 4월 민속촌에서 기돌례, 도영, 남숙
1979년 4월 민속촌에서 기돌례, 도영, 남숙

 

한밤중에 남숙이 딸 도영을 흔들어 깨웠다. 남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도영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남숙의 엄마를 말하는 거다. 1980년, 76세의 나이로 남숙의 엄마 기돌례가 하늘나라로 갔다.

남숙과 혜숙, 경수, 인숙을 낳고 한국전쟁 때 남편을 여읜 기돌례는 자식들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1962년 아들 경수와 며느리와 함께 살다가 1965년 1월 남숙의 셋째 아이가 태어났을 땐 송림동 수도국산에서 상규를 돌보며 지냈다. 1971년 경수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맸을 땐 병원에서 살다시피 1년을 보냈다. 경수가 이혼하고 아이 셋과 함께 남숙네 집에 들이닥칠 때, 기돌례가 같이 왔는지 먼저 와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돌례는 어디에 머물든 가만히 자식과 손주들을 돌보며 지내는 사람이었다.

기돌례에게서 전과 다른 냄새를 맡은 건 도영이다. 도영은 남숙에게 할머니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그건 나이가 들어서 나는 냄새라고, 늙으면 다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누구도 그 냄새를 신경 쓰지 않았다. 가난해서 외면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병원에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은 병원에 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돌례는 하혈했다. 사흘째 피를 쏟던 날 송림동에 있는 복음병원에 갔다. 의사는 더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고, 율목동 기독병원에서는 더는 손쓸 방법이 없으니 집으로 모시고 가라고 했다.

자궁암이었다. 이미 너무 많이 퍼져서 고칠 수 없는 상태였다. 손 쓸 도리 없이 집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병원에서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 주사를 처방했고, 기돌례의 막내딸 인순이 맡아서 주사를 놨다. 도영은 할머니를 바라봤다. 이렇게 기력 없이 누워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1년 전만 해도 남숙과 함께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웠기 때문이다. 손가락 열 개에 손톱이 까맣게 죽어있었다. 곧 돌아가시겠다고 도영은 생각했다.

교통사고로 혹은 다른 이유로, 집 밖에서 임종하면 장례도 치를 수 없던 때였다. 시신을 집 안에 들여와 장례를 치르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절로, 방에서 임종한 경우에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장례식장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가정집에서 치르는 장례를 정석으로 여겼다.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아파트와 병원에서 임종하는 사례가 늘었고, 병원 영안실에서 불법으로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생겨나던 시기다. 장례식장이 허가제로 합법화된 것이 1973년이지만, 도심의 병원 장례식장은 여전히 불법이었다. 장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지만, 남숙에게는 낯설었다.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집에서 기돌례의 죽음과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막상 닥치니 온몸이 벌벌 떨렸다.

남숙은 도영에게 기돌례를 깨끗이 닦아야 한다고 말했다. 새벽에 자다 일어난 도영도 얼떨떨하고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마당에 나가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수건을 가져와서 할머니의 몸을 닦았다. 얼굴에서부터 목, 가슴, 팔, 다리, 발끝까지 구석구석 닦았다. 도영은 넋 놓고 울고 있는 남숙에게 이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남숙은 미리 준비한 수의를 가지고 와, 도영과 함께 기돌례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다. 그때 상규가 집에 들어왔다. 친구랑 놀다 새벽에 들어온 상규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어린 상규를 사랑으로 보살펴 준 할머니였기 때문에 정이 많이 들었었다. 남숙은 상규에게 어서 장의사를 모셔오라고 했다.

장의사댁은 문이 닫혀 있었다. 문을 한참 두드리니 자고 있던 장의사가 일어나서 나왔다. 칠성판과 백로지, 한지와 장례용품들을 챙겨 송림동 수도국산으로 갔다. 장의사가 깨끗한 모습의 기돌례를 보고는 도영에게 고생했다고 말했다. 손녀딸이 정성껏 예쁘게 단장해줘서 기뻐할 거라고 위로했다. 장의사는 한지로 몸을 싸 가지런하게 정돈했다. 칠성판 위에 백로지를 놓고 그 위에 시신을 눕혔다. 병풍을 치고 향불을 마련하고 촛불을 켰다. 모든 준비가 다 된 다음에야 장의사는 남숙을 보며 곡을 하라고 했다. 남숙은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하고 외쳤다.

형우는 송림동 집마다 돌아다니며 문을 두드리고,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새벽에 자다 일어나 소식을 들은 수도국산 달동네 사람들은 형우와 남숙을 위로했다. 날이 밝자 인순과 선애는 현대시장에 가서 장을 봐왔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거다. 조문객들은 안방에 들어와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상주와 맞절했다. 상주인 경수는 오는 손님들과 계속 술을 마시고 결국 하루도 못 가 만취해서는 장례식 내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자리를 남숙과 형우가 지켰다. 마루와 건넌방에 밥상을 마련하고, 육개장과 밥을 대접했다. 식사를 준비하고 치우는 일은 인순과 선애와 도영이 했다. 삼일 낮과 밤 동안 이 집 여자들 몸 상한다며, 동네 여자들이 와서 품앗이하고 갔다. 완장 하나 차지 않은 여자들이 기돌례의 가는 길을 보살폈다.

 

1983년 2월 부평고등학교에서 상규 졸업식날 남숙과 도영
1983년 2월 부평고등학교에서 상규 졸업식날 남숙과 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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