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사람들이 겪은 6.25전쟁' (6)머리 위로 흩날리는 눈발
[인천in]과 인천문화재단 문화유산센터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10월20일부터 매주 화요일 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 당시 인천의 모습을 담은 사이버 사진전 <인천 사람들이 겪은 6·25전쟁>을 8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번이 여섯 번째다.
이번 사진전은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갑생 연구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수집한 80장에 달하는 인천 사진자료들을 분석한 것으로, 사진 대부분 6·25전쟁 당시 월미도와 인천의 모습을 최초로 공개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24일 공개하는 사진들은 1.4후퇴로 추운 겨울 다시 피난을 떠나는 피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포성과 총성에 놀란 이들은 간단한 짐만 챙겨 무작정 남쪽으로 가려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피난민들의 행렬에는 손수레를 탄 아이들의 천진한 표정이 인상에 남는다.
피난민들은 점점 늘어났고 가장 많을 때는 2,000여명이 인천항에서 평택항으로 피난을 떠났다. 전쟁초기와 1.4후퇴, 두 번의 피난과 복귀 속에서 피난민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1951년 2월 이후 인천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만석동 북인천항에 모여든 피난민과 출발하는 LST 801 천안함. 1951년 1월5일 촬영된 사진이다. 일제강점기 1939년 만석동 묘도를 깎아 조성한 북인천항이 피난 인파로 가득 차있다. 출항하는 해군 상륙함 LST 801 천안함 갑판도 피난민과 그들의 짐으로 빼곡하다.
수레를 밀고 있는 소녀. 짐을 겹겹이 쌓은 수레를 소녀가 밀고있다.
해안동 해망대(지금 올림포스 호텔이 있는 자리) 남쪽 도로를 가득 메운 피난민들. 도로와 부두의 경계에 철조망을 설치해 일반인의 부두 출입을 막았던 것으로 보인다. 군인들이 도열(많은 사람이 죽 늘어섬)한 곳에 있는 철조망을 통과해 피난민들이 배를 타기위해 잔교(부두에서 선박에 닿을 수 있도록 해 놓은 다리 모양의 구조물)로 향하고 있고 철조망 앞을 군인이 지키고 있다.
피난민 및 전쟁피해자 분포지도. 1951년 9월30일 현재 피난민분포와 각 지역 연합군 사령부의 위치를 표기한 지도로 경기도가 전체의 23.7%로 가장 높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전라남도와 북도가 그 뒤를 잇고있다.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인천을 비롯한 경기도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51년 6월6일 인천에 버려진 전쟁고아들. 1.4후퇴 이후 인천 곳곳에서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아이들이라고 한다
1951년 1월3일 인천 철도 차량기지에 대기 중인 열차에 올라탄 피난민들.
만석동 해안 제방의 피난민. 목선으로 탈출하기 직전의 피난민들. 두꺼운 옷으로 꽁꽁 싸맨 세 모녀 뒤로 피난 보따리가 싸여있다. 좌상단으로 물치도가 보인다
나무 잔교를 통해 배에 오르는 피난민들. 잔교 위로는 식량으로 보이는 가마니가 쌓여있다. 한 여인이 배와 잔교사이에 걸친 나무판을 통해 배로 건너가고있다
피난민을 실은 어선. 배안에 가득놓인 피난민의 짐들 사이로 아이들이 앉아 있다 가마니로 포장한 매트리스와 짐 위에 놓인 철제 침대에서 배를 탄 피난민이 상류층임을 추정할 수 있다.
피난민으로 가득 찬 인천항 잔교. 1951년 1월3일 인천항 잔교는 피난민들과 그들의 짐으로 가득 차있고 한국 경찰과 해군 병사들이 승선 대상 인원을 호명하고 있다.
줄지어 상륙함에 오르는 피난민. 부두에서 무너진 축대를 내려와 정박한 상륙함에 줄지어 오르고 있는 피난민들. 멀리 청관 건물과 대불호텔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