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나고 - 인천의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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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 인천의 재건
  • 서예림 기자
  • 승인 2020.12.0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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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과 인천문화재단이 함께 하는 온라인 사진전
'인천 사람들이 겪은 6.25전쟁' - (7)도시의 판을 다시 짜다
미군의 원조사업에 참여한 한국인 노동자들.

[인천in]과 인천문화재단 문화유산센터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10월20일부터 매주 화요일 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 당시 인천의 모습을 담은 사이버 사진전 <인천 사람들이 겪은 6·25전쟁>을 8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번이 일곱 번째다.

이번 사진전은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갑생 연구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수집한 80장에 달하는 인천 사진자료들을 분석한 것으로, 사진 대부분 6·25전쟁 당시 월미도와 인천의 모습을 최초로 공개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8일 공개하는 사진들은 6.25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53년 8월부터 미군과 유엔의 피난민과 전재민(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사람)들을 위한 원조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대한원조 사업은 구호, 재건, 군사지원, 지역개발 등으로 지역 공동체 교육 및 훈련에 집중됐다.

인천에서는 행정기관 건물신축, 도로개선, 교육 등에 집중됐다. 이를 두고 ‘원조 신화’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1954~55년까지 원조사업 내용은 주로 직업교육과 고아원 건축이었다. 특히 인천 교육시설 건축은 전국 민간 부문 원조 건수 중 가장 높았다.

 

활기를 되찾은 인천 시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밝은 표정으로 기운이 넘쳐보인다. 우상단으로 인천 기상대가 보인다.

 

식량을 배급하고 있는 유엔군 민사경비대. 1951년 3월17일 마을 아낙들이 유엔군 민사경비대 앞에서 줄지어 서서 식량을 배급받고있다.

 

판유리 공장내부. 1950년 12월 유엔은 폐허가 된 한반도의 복구를 위해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CRA)을 설립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본격적인 재건사업을 추진했다. 1956년 만석동 북인천항 매립지에 판유리 공장 건설에 들어가 이듬해 9월 준공식을 개최하면서 본격적으로 판유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외국인교수와 대학생들의 기술실습 모습. 대학생들이 공장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외국인 교수의 지도 하에 실습을 진행하고있다.

 

인천의 항구에서 보리쌀을 하역하는 모습.

 

판유리 공장 건설. 6.25전쟁이 끝난 후 만석동 북인천항 매립지에 판유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모습. 콘크리트 타설이 끝난 건물 기초 앞으로 대형 원통형 구조물이 건설되고 있다. 모양으로 보아 대형 용광로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 시내 교통지도(1955년 이후 추정). 인천 시내의 도로망과 교차로, 철도를 표시한 교토지도로 동인천역이라고 표기하고 있어 역명이 축현에서 동인천으로 변경된 1955년 7월 이후의 지도로 보인다.

 

1956년 9월30일 인천항의 조수 도크에 물이 빠진 모습과 5동의 창고가 건설된 모습.

 

미군 저유기지(P.O.L)로 활용되던 용현동 경성화학 인천공항 부지. 광복 후 인천에 주둔한 미군은 제2도크 건설부지, 낙섬, 용현동 등지에 대형 저유탱크를 설치했다.이 시설은 6.25전쟁 당시에도 사용됐다. 특히 용현동 경성화학 인천공항 부지(지금 SK스카이뷰 아파트)에 대규모 저유기지를 건설하고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석유를 일단 여기로 옮겨온 뒤탱크에 실었다. 사진에는 수인철도 협궤 선로 옆으로 폭이 조금 넓은 표준궤 선로의 흔적이 있다. 저유기지 내부로도 철도가 보여 인천항에서부터 철로를 이용해 용현동까지 석유를 운반했던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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