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마다 사연과 아픔을 이해하는 여자들
상태바
집마다 사연과 아픔을 이해하는 여자들
  • 권근영
  • 승인 2020.12.09 10: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24) 달동네 여자들의 계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나들이 간 남숙과 빼아줌마
나들이 간 남숙과 빼아줌마

 

수도국산 달동네에서 남숙은 별명 붙이기의 달인이었다. 주로 생김새 특징이나 행동으로 별명을 붙이곤 했는데, 빼빼하게 말랐다고 해서 ‘빼 아줌마’, 뭔가를 자꾸 까먹고 잊어버린다고 해서 ‘덜렁이 아줌마’라는 식이었다. 자식이나 손주의 이름으로 별명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넓은 마당을 가진 동네 여자의 딸은 미국 사람과 결혼하고 이민 갔다. 그 딸이 낳은 아이의 이름이 ‘쫜’이라고 했고, 그 발음이 어려웠던 남숙은 ‘짜니’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 넓은 마당을 가진 여자의 별명이 ‘짜니 할머니’가 되었다. 별명은 중간에 바뀌기도 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동네 여자에게 ‘깜상’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이 여자에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손주가 생긴 것이다. 깜상 아줌마가 있는 곳에는 항상 우남이가 있었다. 손주가 그렇게 좋냐고 물으면, 말해 무엇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매일 손주를 등에 업고 수도국산을 돌아다니는 ‘깜상 아줌마’를 동네 여자들은 점점 ‘우남이 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남이 할머니’는 동네 마당발이자 반장 아줌마였다. 집집마다 사연과 아픔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우남이 할머니는 정기적으로 여자들을 모아 ‘계’를 했다. 오랫동안 얼굴을 보아왔고, 성품이 나쁘지 않은 여자들에게 금계나 돈계를 같이하자고 제안했다. 남숙에게도 제안이 왔다. 계를 하나 같이 하자는 말에, 남숙은 단번에 거절했다. 없이 사는 동네에서 여자들이 모여 계를 하는 건 너무나 불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남이 할머니는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다 책임을 진다고 했다. 믿을 수 있는 여자들이라고 자신의 안목을 믿어보라고 했다. 남숙은 우남이를 업고 있는 얼굴이 까만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갖은 고생으로 얼굴이 까만 이 여자가 억척스럽다고 생각되었다. 남숙은 한때, 우남이 할머니와 용광로 쌓는 일을 하러 다녔다. 그 안은 불구덩이 같았다. 여자들이 용광로용 벽돌을 날라주면 남자 기술자들이 널빤지에 올라가서 탁탁 이어 붙였다. 땀이 계속 흘렀고, 침을 뱉으면 끈적했다. 일당이 세서 가긴 했지만 아주 위험했다. 남숙은 벽돌을 건네다 넘어진 이후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치료비를 주지 않는 일용직 일은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우남이 할머니는 연락이 오면 언제든 용광로 일을 하러 나갔다. 동네 여자들을 하나, 둘 데리고 가기도 했는데, 일이 너무 힘들어서 오래 버티는 사람은 없었다. 악착같이 꾸준히 하는 여자는 우남이 할머니뿐이었다. 그 오랜 노동의 시간이 거뭇한 얼굴에 보였다.

남숙은 결국 계모임에 나갔다. 열 명의 여자들이 우남이 할머니네 안방에 모였다.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친 여자도 있었고, 처음 보는 여자도 있었다. 같은 동네이긴 했지만, 골목 줄기가 달라서 서로의 속사정을 알지는 못했다. 우남이 할머니만 믿고 온 거다. 심지를 뽑아 순서를 정했다. 계주인 우남이 할머니가 첫 번째고, 2번부터 10번까지가 정해졌다. 여자들은 순서를 놓고 다시 상의한다. 자식의 결혼이나 대학입학 같은 목돈이 들어가야 하는 달을 이야기하고, 바꿔 달라고 하는 거다. 남숙은 2월에 막내 상규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1월에 첫째 인구가 결혼식을 올려서 당분간 목돈 들어갈 일은 없었다. 둘째 도영도 사회생활을 잘해나가고 있던 터라 다른 여자들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계모임은 아주 잘 흘러갔다. 수도국산 달동네에서 오래 살아온 우남이 할머니가 모아 온 여자들은 남편이나 시부모가 집주인으로 살고 있었다.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이사 가거나 연락 두절될 소지가 적은 사람으로 계를 꾸린 것이다. 정해진 날짜까지 돈을 마련해오지 못하는 경우 계주인 우남이 할머니가 채워 넣고, 나중에 갚기도 했다. 다른 계 모임에서는 곗돈을 먼저 타 먹고 날랐다더라, 집을 나가서 찾을 길이 없다더라 하는 소문들이 돌기도 했다. 그 이유를 짐작해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구석들이 있었다. 이해와 원망과 아쉬움과 답답함 사이를 오가다, 서로의 고충을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고, 반찬거리를 얘기하다가 헤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 사건은 하루 아침에 일어났다. 남숙의 남편 형우가 갑자기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날만 해도 참외전거리에서 일하고 기분 좋게 막걸리를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자는 동안 혈관이 막혀 뇌경색이 왔다.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무리 꾹꾹 눌러 주물러도 소용이 없었다.

 

1957년 송림동에서 형우와 아들 인구
1957년 송림동에서 형우와 아들 인구

 

아들 인구는 형우를 업고 배다리에 있는 한의원으로 갔다. 의원은 중풍에는 금침을 놓는 것이 제일이라며,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영영 반신불수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금침은 비쌌지만, 가격을 재고 있을 틈이 없었다. 형우를 치료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루에 한 번씩 한의원에 가서 금침 세 대를 맞았다. 숟가락질은 왼손으로 하고, 지팡이를 짚고 마당에 나와서 걷는 연습을 했다. 마당 끝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면 시간이 한참 걸렸다. 속이 안 좋을 때는 화장실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바지에 실례한 적도 있다. 형우의 옷가지를 벗겨 깨끗이 빨아 널고, 몸을 닦는 일은 남숙의 몫이었다. 수건에 물을 묻혀 살집이 있는 넓적한 등과 팔뚝, 두툼한 손을 닦았다.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정리해주고, 입가에 침이 고이지 않도록 말끔히 얼굴을 닦아주었다.

남숙이 취로사업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형우를 돌보는데 우남이 할머니가 찾아왔다. 우남이 할머니는 남숙에게 돈을 건넸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무슨 돈이냐고 물었더니 곗돈이라고 했다. 아직 차례가 되지 않았는데 남숙의 처지를 알고, 여자들이 논의해 순번을 바꿨다고 했다. 당장 큰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텐데, 먼저 쓰고 남편부터 살리라고 말이다. 생각지 못한 배려에 남숙은 감동했고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한 달이 지나자 형우는 지팡이 없이도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남숙은 계모임에 나갔다. 여자들을 만나 이해와 원망과 아쉬움과 답답함 사이를 오가다, 서로의 고충을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고, 반찬거리를 이야기하다가 헤어지는 날들을 다시 이어갔다.

 

1986년 딸 도영이 결혼 후 보내준 제주도 여관에서 남숙과 형우
1986년 딸 도영이 결혼 후 보내준 제주도 여관에서 남숙과 형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