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인천의 실학자 소남(邵南)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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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인천의 실학자 소남(邵南)을 깨우다
  • 윤종환 기자
  • 승인 2020.12.11 1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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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윤동규를 조명한다] (1) 9대 종손 윤형진씨 인터뷰

[인천in]이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 윤동규(1695~1773)의 삶과 업적, 연구·기념 사업 등을 조명하는 특집을 3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최근 소남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남동문화원은 오는 12월30일 소남 탄생 325주년를 맞아 기념사업준비위 발족과 평전 출판기념회 등을 갖고 본격적인 소남 선양 사업에 나섭니다. [인천in]은 이에앞서 △소남의 9대 종손 윤형진씨 인터뷰 △남동문화원의 소남 발굴 및 연구사업 △소남 기념사업 및 향후 계획에 대해 차례로 싣습니다.

 

 소남이 성호 이익 선생에게 보낸 간찰 내용이 담긴 '소남선생유집' ©성호기념관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거친 17세기, 조선에선 실학(實學) 또는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이라 불리는 새로운 학맥이 태동했다.

지봉(芝峯) 이수광과 반계(磻溪) 유형원으로부터 시작된 실학의 계보는 성호(星湖) 이익을 거쳐 순암(順庵) 안정복, 연암(燕巖) 박지원, 다산(茶山) 정약용 등으로 이어졌고,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중·후기 조선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실학 사상의 비조 반계·성호와 다산 등 후기 실학파 인사의 학풍은 급진성 측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으나, 기존에 행해지던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사대주의적 연구를 지양하고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는 입장은 세대를 떠나 동일했다.

현실에 방점을 둔 민족주체적 사상의 발달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민족사와 역법, 과학, 의학, 지리, 국어, 예술 등이 진일보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같은 중요성으로 성호 등 실학파의 주요 인물 및 학파·학풍에 대한 연구는 그간 다양한 측면에서 폭넓게 진행돼 왔다.

 

조선 중기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의 모습을 복원했다. 소남의 종손이 당대의 복식을 갖춰 입었다. 

 

그런데 연구 대상서 중요한 한 사람이 빠졌다.

최근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인천 출신의 이 인물은 순암을 포함한 성호의 문인들에게 윤장(尹丈)으로 호칭될 만큼 어른으로 추대됐고, 성호 사후 제자들의 의지처로서 종장(宗匠) 또는 사표(師表)로 인정 받았던 문인이다.

성호의 4대 제자 중 하나인 순암 안정복은 이 인물에 대해 쓴 행장(죽은 사람의 정보를 서술한 글)에 “성호 이 선생이 윤장의 지조가 견실하고 견해가 명석한 것을 사랑하여 ‘우리의 도가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고 썼고, “이 선생께서 병이 위급할 때 선생을 불러 생전의 유언을 일러 주시되 도를 전하는 책임을 당부하였다”고도 썼다.

아울러 “성호 선생이 <사칠신편>을 저술하실 적 선생(윤장)이 변론하니, 성호 선생이 그 변론에 수긍해 발문을 즉시 지워버리고 그 설을 쓰지 않았다”고 적었다.

또 다른 제자 정산(貞山) 이병휴는 성호가 별세한 뒤 성호를 섬기던 것처럼 이 인물을 섬겼고, 그에게 교정 받을 기회를 잃어 한탄하기도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기록들을 종합하면 윤장으로 불렸던 이 인물은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서, 퇴계(退溪)를 계승한 성호학파의 역사관과 실학관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 실학파의 중시조격 학자로 평가되는 이 인물은 현대에 접어들어 완전히 잊혀졌다. 그가 저술한 서책이 거의 없을뿐더러, 편지 등의 유물도 그간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남선생유집초 전질

 

최근 인천 남동문화원을 중심으로 잊혀진 실학자, 윤장으로 불린 인물에 대한 복원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우연한 계기로 그가 남긴 유물들이 세상에 공개되었고, 그가 인천에 깊은 연고를 지닌 ‘인천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다.

[인천in]은 먼저 지난 4일 남동구 소래아트홀 내 남동문화원 사무실서 윤형진(75)씨를 만나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윤형진씨는 이 인물의 9대 종손이다.

“선생의 성은 윤씨(尹氏)고, 휘는 동규(東奎), 호는 소남(邵南)으로 고려 중기 여진족을 정벌한 파평가(坡平家) 윤관의 24대 손입니다. 소남 선생은 17세에 성호 이익 선생의 문하에 들어 그의 첫 번째 제자가 됐죠”

잊혀진 인물은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 1695-1773)였다. 소남은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서 신후담·이병휴·안정복 등과 함께 이자수어(李子粹語,) 성호사설(星湖僿說) 등 성호의 주요 학술 저서들을 함께 편찬해냈고, 성호 사후 학파의 중심이 됐던 인물이다.

“젊은 시절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발령이 잦았는데 우연한 계기로 인천 종가의 선산 앞에 집을 짓고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 당시 성균관대 교수였던 김시업 교수가 저를 찾아왔어요. 유물을 좀 보자고요. 그 때 소남 선생의 유물이 세상에 처음 공개된 거였죠”

종손 윤형진씨는 자신이 젊었을 적엔 소남의 유물이 지닌 가치를 잘 몰랐다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그저 커다란 궤짝 안에 쌓여 대대로 전해져 왔을 뿐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우연한 계기로 이뤄진 인천으로의 이사, 그리고 김 교수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소남의 유물은 아직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후 2005년 무렵 인천시립박물관서 학예사로 근무하던 윤용구 박사를 만나 소남 선생의 유물을 맡겼습니다. 유물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었기도 하고, 윤 박사라면 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부터 소남이 성호, 순암 등 당대 문인들과 주고받은 간찰(편지) 600여통을 포함한 고문서 1천300여점과 서책 318점, 6대에 걸친 호패 등이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되고 유물 목록도 만들어졌다. 앞서 유물을 접한 김시업 교수와 성균관대는 영인본을 제작한 뒤 다시 종가에 반납했다.

 

소남 윤동규 선생의 9대 종손 윤형진씨 

하지만 5년 뒤인 2010년 소남의 유물은 경기도 분당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재이관된다. 학예사인 윤용구 박사가 시립박물관을 떠나면서 유물에 대한 연구와 고증도 함께 중단됐기 때문이다.

“소남 선생은 소성현 도남촌(현 남동구 도림동)에 정착해 평생을 살았고 임종하기 전 본인의 명정에 소남촌인(소성현 남촌사람)이라고 쓰게 할 정도로 인천 사람인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던 분입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연구인력이 충분한 한국학연구원을 찾았지만 유물이 인천서 연구되고 활용되지 못한다는 점은 늘 아쉬운 마음으로 남았어요”

이후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텍스트화 작업을 거쳐 서간집을 발간하고 몇 차례의 심포지엄을 여는 등 유물 목록을 정리한 것에 그친 인천시립박물관에 비해서는 좀 더 진전된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쉬운 마음이 커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15년 동안 수 차례 연구가 진행됐고 연구 기관이 바뀌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도 깊이 있는 연구는 진행되지 않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요”

윤 종손은 “깊이 있는 연구란 유물 해제(번역)작업을 거쳐 고증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호학파의 형성 과정에서 이익·소남·안정복 등이 나눈 진지한 논의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소남 선생 개인의 사상·사유를 발굴하고 체계화 시키는 것. 이것이 깊이 있는 연구가 아닐까요?”라고 술회한다.

소남이 남긴 고문서들은 한자체를 알아내 옮겨 적는 텍스트화는 일부 진행이 됐지만 아직 번역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해제본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관련 연구도 진행되기 힘든 상황이다.

소남 윤동규가 그린 천체도

 

“유물 해제는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많은 자금과 전문 인력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개인이나 단일 기관이 깊은 연구를 진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죠. 그러다가 올해 2월 문중 사람의 소개를 통해 남동문화원 신홍순 원장을 만났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 소남 연구 작업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지역의 향토문화와 인물을 발굴·보존하기 위해 설립된 남동문화원은 인천 남동구 출신 소남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윤 종손은 다시 한 번 깊이 있는 연구를 기대해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처음 신 원장을 봤을 때는 사실 믿지 않았어요. 문화원의 규모도 작고 인력도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어떤 사람보다도 자신만만해 하는 신 원장의 모습에 ‘이 사람이라면 믿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 투자했습니다”

윤 종손은 요즘 점점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된다. 다양한 연구와 행사를 통해 소남을 인천 시민들에게 알리고, 나아가 인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성호학파의 외연을 인천으로 확장시키겠다는 문화원 측의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문화원 측은 인천대 인천학연구원과 유물 해제 작업을 함께 하기로 합의했고, 이를 위한 시 예산 3억원도 확보했다. 이 밖에도 3D 작업을 통해 소남의 생전 모습을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윤 종손은 “소남 선생 연구에 국가비용이 투입됐고, 지역 대학까지 나서 주니 기쁘다”며 “학계에서도 관련한 움직임이 나타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소남 윤동규의 묘. 인천 남동구 지역 아파트 개발에 밀려 현재는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이장된 상태다.

 

소남 윤동규의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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