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열정, 낭독하다 몰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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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열정, 낭독하다 몰입하다
  • 허회숙
  • 승인 2020.12.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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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허회숙 / 월요문인회 회장
지난 11월14일 배다리 시다락방에서 열린 시낭송회
지난 11월14일 배다리 시다락방에서 열린 시낭송회

 

지난 11월의 두 번째 토요일 오후, 배다리 아벨서점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고향 마을에라도 들어선 듯 설레었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수북히 쌓여 불어오는 바람결에 이리 저리 흩날리는 길가에 나즈막하게 늘어선 헌책방들, 토요일 오후임에도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 고즈넉한 거리에서 60여년 전 저 너머 단발머리 나풀대며 걷고 있는 소녀 시절의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는 이 배다리를 사이에 두고 동 서로 배치되어 있었고 우리 집은 그 중간쯤이어서 나는 12년 세월을 이 거리를 걸으며 보냈다. 설익은 실존주의 철학을 익혀 니체와 까뮤의 사상을 논하고 싸르트르와 루이저 린저에 빠져 열광하며 토론을 벌이던 곳도 이 거리였다. 그 당시 용돈에 궁했던 우리는 학기말이 되면 참고서와 교과서를 이곳에 들고 와 몇 푼 안 되는 돈과 바꾸어서는 친구들과 극장에도 가고, 단팥죽도 사먹으며 몰려다녔다. 신학기가 되면 부모님께 책 사겠다고 타낸 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 헌책방 거리를 돌며 참고서와 필요한 책들을 사기도 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배다리 헌 책방거리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져 갔다. 가끔 ‘새로운 도로 확충과 주택지 조성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배다리 헌책방거리의 주민들과 시민단체가 투쟁에 나섰다’는 기사가 지역 신문에 뜰 때면 “아 ~ 그 거리는 내 마음의 고향인데~”하는 정도의 아쉬움을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뜻있는 인사들과 서점 주인들이 이곳을 문화의 거리로 자리매김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 결과 철로 변 도원역 가는 길은 골목 갤러리가 되었고 그 일대에 공방이 들어섰다. 이웃한 서점들의 빈 공간에서는 각종 문학 강연이 이루어지는 등 차츰 문화의 거리로 변모되어 갔다. 10여 년 전부터 박경리의 체온이 남아있는 아벨서점에서도 매달 한 번씩 시낭송회가 열리게 되었다.

나는 재작년부터 지역사회 문화센터에서 ‘소통의 글쓰기’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수업 후 수강하시는 분들과 식사도 하고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인생의 온갖 고비를 다 넘기고, 마음을 비운 분들의 모임이어서 진솔한 대화가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러다가 몇 분이 작년 5월경부터 소규모 동아리 활동을 해보자는 의견을 내놓아 연말경에 뜻이 모아져 ‘월요문인회’를 꾸리게 되었다. 문화재단으로부터 동아리 강사비 지원도 받게 되고, 회칙도 만들고, 인터넷 카페도 개설했다.

그런데 1월 말부터 중국에서 들어온 코로나의 기세가 시간이 흘러도 점점 커지기만 하는 와중에 우리 월요문인회도 몇 번의 좌초 위기가 있었다. 이십여 명 안팎의 소집단임에도 한평생 살아온 경륜과 가치관이 다른 분들인데다가 평균 연령이 75세에 이르다 보니 별 것 아닌 일도 쉽게 타협이 안 되는 어려움이 있었다. 어쩌다 대표 자리를 맡은 나부터 급한 성격에 좌충우돌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오랜 공직생활 동안 몸에 굳어버린 경직된 자세가 쉽게 고쳐지지 않아 옆에서 기둥 역할을 하던 분이 잠적해 버리는 일도 생기고, 정치 중립을 표방한 단체임에도 은연중 정치적 발언을 하는 회원과 이로 인해 상처를 입은 회원 간의 갈등도 있었다. 더욱이 8월 15일 전후, 수도권 일대에 코로나가 재 유행하여 2.5단계가 발령되자 한 달 이상 수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월요문인회원들의 창작에 대한 열망은 이 모든 난기류를 뚫고 늦가을의 결실을 맺게 해 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글쓰기라는 새로운 시도에 즐거움을 가지고 매주 열심히 자작품을 가지고 합평을 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코로나로 인한 몇 번의 연기 끝에 드디어 열리게 된 11월 두 번째 토요일의 시낭송회는 우리 월요문인회 발족 후 그동안의 활동을 총 결산하는 행사였기에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걷는 내 마음의 감회는 특별했다.

그 날 조촐한 우리만의 축제는 모두가 하나로 응집한 듯한 일체감속에 흘러갔다. 시 낭송회 사상 드물게 이어진 2시간 30분간 우리 모두는 몰입의 순간을 경험하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K 회원이 어려운 시절을 이기고 오늘을 일구어 낸 진솔한 작품을 낭독하자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회원도 있었다. 내빈으로 자리를 함께 한 인천in의 S대표가 그동안 독자칼럼을 통해 익숙해진 작품들이 많고, 날로 성숙해지는 작품 수준을 보며 가족 같은 흐뭇함으로 박수를 보낸다는 정겨운 덕담을 하자 분위기는 더욱 흥겨워 졌다. 낭송회의 끝자락에서 아벨서점의 G사장님이 ‘즐거운 우리 집’을 성악가에 버금가는 실력으로 불러주시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수준 높은 시 낭송회 분위기에 저절로 노래가 나왔노라는 G사장님의 말씀에 평소에도 창(唱)을 불러 분위기를 띄워 주시던 L선생님과 작곡을 즐겨 하시는 J선생님이 뒤질세라 창(唱)과 가곡을 한 곡조씩 뽑아내 주시어 아름다운 피날레를 장식했다.

2020년은 코로나로 시작되어 코로나로 저물어 스산한 한 해가 되었다. 그러나 월요문인회 회원들은 오히려 그 속에서 위로와 격려의 동력을 얻어 자신의 작품 수준을 높여갔다. 2020년을 결산하면서 그동안 지원해 주었던 인천문화재단에서는 147개 예술동아리 중에서 우리 월요문인회가 모범적인 활동을 한 동아리라고 평가했다.

12월 1일에는 중앙의 예술진흥원 관계자와 월요문인회 대표, 부대표 및 지도교수 그리고 담당 정지연 코디가 인터뷰를 하는 경사스러운 일도 있었다.

문득 최근에 ‘옹달샘에 던져보는 작은 질문들’이라는 책을 내신 박영신 인하대 교수의 시가 내 마음에 떠오른다.

그리운 옹달샘은/ 깊고 깊은 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마음 밭에도 있다/ (중략) / 불현 듯 다시 찾은/ 고향의 옹달샘에/ 고요히 던져보는 작은 질문들/ 울림은 울림을 부르고/ 바람은 바람을 일으키리니/ 맑디맑은 옹달샘에 마른 목을 축이다.

이 세상엔 좋기만 한 일도 없고,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는 사실을 살아오면서 많이 느낀다. 올 해 들어 처음으로 지난 밤 함박눈이 소복이 쌓였다. 아침에 창밖으로 내다본 거리는 새하얀 솜이불에 싸인 듯 포근하면서도 해맑은 얼굴이다. 올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역시 올 해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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