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교회에서 올린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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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교회에서 올린 결혼식
  • 권근영
  • 승인 2020.12.22 18: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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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25) 남숙의 둘째 딸 도영의 결혼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1986년 4월 5일 송현교회 유치부실에서 남숙과 도영
1986년 4월 5일 송현교회 유치부실에서 남숙과 도영

 

저기요, 하고 누군가 도영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남자였다. 누구세요? 하고 물었더니 요 앞에 대우자동차에 다니는 사람인데 미팅 자리 좀 놔줄 수 있냐고 했다. 도영이 일하는 부평 대한마이크로 회사는 여직원들이 많아서 가끔 출근길에 미팅 제안을 받곤 했다.

도영은 연애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딱 한 번 TBC에서 방송하는 <행운의 청춘열차> 프로그램 녹화 현장에 따라간 적이 있는데, 참여자로 간 것이 아니었다. 방송국이 너무 궁금해서 인솔자를 자청했었다. 김웅래 PD가 연출하고, 코미디언 배일집과 허원이 사회를 보는 <행운의 청춘열차>는 회사 대 회사의 단체 맞선 프로그램으로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이 프로그램으로 결혼한 사람들은 가끔 신문에 공개되기도 했다.

맞은 편에 대우자동차 직원 4명이 보였다. 참여자 8명은 서로를 탐색하기에 바빴다. 도영은 맞선 프로그램도 재밌지만, 처음 와 본 방송국이 신기하고 재밌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던 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아침 9시에 출발해서 밤 9시가 넘어서 인천에 도착했는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좋았다. 그날 한 커플이 탄생했고, 커플이 되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즐거워했다.

도영은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회사 체육대회 때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하는 활동을 도맡았다. 앞에 나가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기도 했다. 동료들은 유쾌하고 활동성 좋은 도영을 좋아했다. 대한마이크로 회사에는 써클이 여러 개 있었는데, 여자들은 일하면서 취미 생활을 같이했다. 도영은 합창단에 들어갔다. 음색이 높고 고와 소프라노를 맡았다. 합창단에서는 제17회 인천시민의날 합창경연대회를 앞두고 있었는데, 인천시가 경기도에 속해있다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행사의 의미가 커졌다. 일주일에 며칠씩 일을 마친 후 강당에 모여 연습을 했는데, 1981년 5월 10일 대한마이크로 합창단은 금상을 받았다.

대한마이크로전자(주) 야유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도영
대한마이크로전자(주) 야유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도영
1981년 5월 10일 인천직할시 승격 및 제 17회 시민의 날 합창 경연대회에 참가한 대한마이크로 합창단
1981년 5월 10일 인천직할시 승격 및 제 17회 시민의 날 합창 경연대회에 참가한 대한마이크로 합창단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회사 동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가족들도 그랬다. 도영의 오빠 인구는 나중에 결혼식 때 꼭 축가를 불러 달라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이야기했다. 도영은 꾸준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언제고 노래를 하고 있을 테니, 그때 가서 말하라고 했다. 1983년 11월 인구는 신신예식장에서 연희와의 결혼을 앞두고, 도영에게 축가를 불러 달라고 했다. 도영은 2년 전의 축하와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 봄에 결혼해, 라고 도영의 직장 동료 현숙이 말했다. 대한마이크로 회사에서 동갑내기 단짝 친구였기에 도영은 꼭 선물해주고 싶었다. 무엇을 받고 싶냐는 물음에 현숙은 결혼식 때 와서 축가를 불러 달라고 했다. 도영은 축가는 얼마든지 불러줄 수 있는데, 필요한 건 없냐고 물었다. 현숙은 도영의 어려운 집안 사정까지 알고 있었기에, 결혼식 때 와서 축가를 불러주는 것으로도 큰 선물이라고 했다.

현숙은 부평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거기, 축가를 부르는 도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신랑의 직장 후배 대성이었다. 대성은 결혼식이 끝난 후, 선배에게 도영을 소개해 달라고 여러 번 졸랐다. 끈질긴 부탁에 현숙이 자리를 마련했고, 도영은 마지못해 나갔다. 철도청 구둔역(경기 양평)에서 근무한다는 남자는 눈이 반짝반짝하고, 머리가 아주 좋아 보였다. 첫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연애라는 걸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도영은 어색하기만 했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동인천 송현교회에 간다는 도영의 말에 대성이 주말마다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도영은 교회 찬양단이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 노래와 율동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대성은 일찍 예배당에 나왔다. 오직 도영을 만나기 위해서다. 처음엔 쭈뼛거리고 엉거주춤하며 뭘 해야 하는지 몰라서, 멀뚱멀뚱 앉아만 있었다. 몇 주가 지나자 도영의 맑은 노랫소리를 따라 자신도 흥얼거리고, 아기자기한 율동을 따라 하며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영은 자신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대성이 귀여워,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도영과 대성은 송현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유치부실은 신부 대기실로 사용했다. 벽에 피터팬과 팅커벨, 웬디와 동생들이 하늘을 날아가는 그림이 걸려있었다. 도영이 직접 손으로 그려서 포스터컬러 물감으로 칠해 오려 붙인 그림이다. 지난 여름 성경학교 때 사용하고, 유치부실에 옮겨 달아두었다. 그 배경으로 마련된 신부 대기실에서 도영을 축하하기 위해 온 하객들과 사진을 찍었다.

1986년 4월 5일, 축가를 부르던 도영이 축가를 받는다. 도영과 대성의 새로운 세계를 응원하는 많은 사람의 합창 소리가 울려 퍼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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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2020-12-23 14:16:31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다음 회가 기다려집니다. 교회 유치부실이 신부 대기실이었다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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