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星湖), 소남(邵南)과 합작하여 글을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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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星湖), 소남(邵南)과 합작하여 글을 완성하다
  • 송성섭
  • 승인 2021.01.12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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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 송성섭(동양철학 박사)
(1) 행장으로 본 소남 윤동규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1695~1773) 탄생 325주년를 맞아 지난 12월 30일 인천 남동문화원이 기념사업준비위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연구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인천in]은 남동문화원의 소남 연구사업을 지난해 12월 [소남 윤동규를 조명한다]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특집기사로 소개했습니다. 이어 새해에는 소남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새해 특집기사는 남동문화원 소남 연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송성섭 박사(동양철학)가 집필을 맡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소남선생유집초(邵南先生遺集草)
소남선생유집초(邵南先生遺集草) - 소남 종가 소장

요즘 인천의 인문학계가 들썩이고 있다. 그 동안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였던 소남(邵南) 윤동규 선생의 유고(遺稿)에 대한 연구 사업이 드디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소남(邵南), 즉 소성현(邵城縣) 도남촌(道南村)에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오로지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爲己之學)만을 하시었으며, 성호학파의 장석(丈席)이셨다. 

소남(邵南) 선생이 살아온 길을 서술한 행장(行狀)은 두 가지가 전해진다. 하나는 순암(順菴) 안정복이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남 선생의 제자 권귀언이 쓴 것이다. 순암의 행장은 선생이 별세하신 지 13년이 지난 을사년(乙巳年)에 쓴 것인데, 선생의 손자 윤신이 묘지명에 사용하기 위해 순암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순암의 행장은 소남의 후손가에서 소중히 보관해온 소남유고 초본을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한 소남유고(邵南遺稿)에 실려 있다.

이와는 달리 소남선생유집초(邵南先生遺集草)에는 또 하나의 행장이 실려있는데, 종손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던 원본 행장이다. 원본 행장은 소남의 제자 권귀언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순암이 쓴 행장 끝부분에서 권귀언이 기술한 원장(原狀)에 의거하여 자신이 행장을 다시 지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소남선생유집초(邵南先生遺集草)에는 순암의 행장은 실려 있지 않다.

권귀언의 행장과 순암의 행장은 문체가 확연히 다르고, 내용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순암의 행장에는 선생이 신묘년, 즉 선생의 나이 17세 때 성호 이익에게 제일 먼저 학문하였으며, 소성의 도남촌으로 이사했고, 도남촌에 장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권귀언의 행장에는 18세에 성호 이 선생에게 집지(執贄), 즉 제자가 스승을 처음 뵐 때 예폐를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는 예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바다 위의 소성현 도남촌에 기거하였고(居於海上之邵城縣道南村), 인천의 남촌에 장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권귀언의 기록에 의해 인천이라는 지명과 해상의 소성현 도남촌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특히 해상(海上)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 당시 도남촌이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 - 인천에서 서울 가는 길과 안산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 아래 바닷가에 남촌이 있다.
대동여지도 - 인천에서 서울 가는 길과 안산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 아래 바닷가에 남촌이 있다.

최근 소남 윤동규 선생의 첫 번째 총서를 발간한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임진년인 1712년에 행보(行甫), 즉 안산에 살던 이정휴의 아들 이경환의 소개로 가르침을 청하였다고 한다(『邵南遺稿』 379쪽). 이로부터 보면 순암의 행장보다 권귀언의 행장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데, 권귀언의 행장도 이번 기회에 번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행장은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호의 행장을 오로지 소남 선생만이 지은 것을 보면, 행장은 문하의 수제자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남의 행장을 권귀언이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권귀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성호전집』에 의하면 형조 참의를 지낸 유헌장(柳憲章)의 셋째 부인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사인(士人) 권귀언에게 시집갔다고 전하고 있다. 유헌장(柳憲章)의 할아버지는 인천부사를 지낸 유호연이다. 또 한 명의 딸은 이용휴에게 시집갔다. 이용휴의 작은 아버지가 성호 이익이며, 아들이 바로 이가환이고, 외조카가 이승훈이다. 이가환은 천주교 문제로 인해 이승훈·권철신 등과 함께 옥사로 순교하였다.

소남 선생의 문집은 일반적인 문집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우선 시(詩) 항목이 없다는 것이다. 『성호전집』에는 소남 선생이 스승인 성호에게 보낸 시의 운을 빌어 쓴 성호의 시가 몇 수 보이는 것으로 보아, 소남 선생이 시를 전혀 짓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니,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만 1727년 5월에 있었던 파평 윤씨 종회에서 문장공(門長公)이 지은 「종회(宗會)」라는 시에 차운하였을 때, “규는 시에 능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치우고 짓지 않았습니다.(奎旣不能詩久矣.輟而不㑅今, 소남 윤동규 총서1, 51쪽)”라고 한 것을 보면, 어느 때부터 시작(詩作)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1922년에 밀양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성호전집》 - 성호기념관 소장 

소남 선생에 관한 글 중에 지금까지 번역된 것은 성호문집이나 순암집(順菴集)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문집에서 소남 선생을 어떻게 호칭하는 지를 보면, 성호학파에서소남이 차지하는 위상을 대강 짐작할 수 있는데, 성호는 소남을 부를 때, 자(子)인 유장(幼章)이라고 할 때가 있으며, 군(君)이라고 할 때도 있고, 공(公)이라고 할 때도 있다. 아마도 사제지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호칭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에 반해 순암은 소남 선생을 호칭할 때, 윤장(尹丈)이라고 하거나, 장석(丈席)이라고 하거나, 집사(執事)라고 하였다. 윤장(尹丈)이나 장석(丈席)은 성호학파에서 첫 제자이면서 제일 맏형이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집사(執事)라는 호칭은 성호학파의 일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일 것이다. 성호 이익에게 유장(幼章) 윤동규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유장이 안산에 머물다가 도남촌으로 돌아올 때, 이별을 아쉬워하여 쓴 성호의 글을 보면, 성호와 유장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태어나면서 거칠고 소략하여 검칙함이 없었다. 일상생활의 언행과 복식이 비루한 속투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우습고 놀랄 만하다. 그러나 유장은 이와 반대여서 그 성향을 보면 거의 풍마우(風馬牛)처럼 차이가 난다.(중략)

   내가 새로 예에 관한 글을 엮었는데, 주위가 쓸쓸하여 스승이 없어서 강정(講定)하여 도움받을 곳이 없었다. 얼마 뒤에 유장이 또 와서 일람하고 서로 대조하였는데, 크게 어긋난다고 여기지 않고 취할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착오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뽑아내 증거를 대어 논하니, 나 또한 의혹이 풀려서 거슬리는 바가 없었다. 이와 같이 마음에 둔 바가 같은 자는 행적이 다른 것과 상관없이 서로 권면하여 진취할 수 있는 것이다.”(「送尹幼章序」, 성호전집 제51권)

 

이로부터 보면, 성호의 첫 제자 유장(幼章)은 성호 선생이 쓴 글을 원문과 대조하고, 취할 만한 점이 있는지 평가하였다. 만약에 착오가 있는 부분이 있으면 증거를 제시하고 수정하여 성호 선생의 글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호 선생의 글은 성호 선생과 그의 첫 제자 유장과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호칭이 집사(執事)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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