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골 생태공원이 주는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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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골 생태공원이 주는 위안
  • 조영옥
  • 승인 2021.01.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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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조영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회원
소래습지생태공원
소래습지생태공원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가 희미한 어둠을 밀어낸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마주치는 사람도 없는 갯골을 그와 내가 익숙한 걸음으로 걸어간다. 짙은 구름 사이로 동녘 하늘이 엷게 붉은 색을 입히려다 구름에 가려졌다. 어두운 새벽길, 혹시 모른다며 그는 기다란 우산을 꺼내 호신용 삼아 손에 단단히 들고 간다. 무더기를 이룬 끄령풀이 희끄므레 보이기 시작한다. 별꽃 같이 작은 노란색 꽃도, 가녀리게 휘여 진 줄기에 마디마디 매달린 분홍꽃들도 자분거리며 따라온다.

산이나 들을 지나칠 때 그는 “이 풀은 보드라워서 소에게 뜯어다 주면 잘 먹겠다.”, “한우는 까다로워 가시엉겅퀴 같은 풀은 고개로 밀어 내지.” “젖소는 억센 풀도 잘 먹는다.”는 등 끄령이 풀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보고는 어릴 적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남편은 어릴 적, 산에서 놀다가 앞질러 가서 끄령을 묶어 놓고 모른 척하고 있으면 친구가 걸어오다가 걸려 넘어지곤 했다고 웃는다. 하지만 다음에는 자기가 당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초가을에 끄령을 베어다가 새끼 꼬듯이 꼬면 아주 질긴 끈을 만들 수도 있었고 멍석을 짜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어릴 적 자연에서 놀아 본적이 없는 나는 풀포기 하나에도 추억이 담긴 정겨운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어린 시절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골풍경을 그려본다. 도시 한복판에서 자란 나는 기껏해야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공기돌 놀이를 하며 놀았다. 여름 날 저녁에는 동네 아이들이랑 어른들이 집 앞에 나무의자를 내어놓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그도 시들해지면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일으켰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옆집의 복실 언니는 뜻을 알고 부르는지 ‘홍콩의 아가씨’, ‘잘있거라 나는 간다. 대전 발 영 시 오십분’ 같은 유행가를 제법 어른 흉내를 내어 가며 불러댔다. 그럴 때면 어른들이 알사탕 한 알씩 나누어 주며 잘한다고 박수를 쳐 주었다.

가끔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고 손가락을 세워보기는 했지만 반딧불이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다. 대신 키가 크고 머리가 노랗거나, 숯댕이로 얼굴을 칠한 것같이 새카만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미군들이 신작로를 활개치고 저희끼리 손짓을 해가며 낄낄거리며 웃고 지나가면 우리는 무서워서 집안으로 숨어들곤 했다. 그 때마다 엄마는 밖으로 혼자 나가지 말라고 우리를 주의 시켰다.

갈 데도 없고 심심해지면 나는 자유공원 층계를 숨차게 뛰어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넘실대는 바닷물이 햇빛에 반짝이고 커다란 배는 부웅 뱃고동을 울리며 천천히 물살을 가르고 있다, 하늘에 퍼져 있는 뭉게구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누군가의 얼굴 같아, 눈을 그려보고 입을 찾다보면 구름은 슬며시 흩어지고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의 얼굴이었을까? 그 때 나는 그리움이 가슴에서 꿈틀거렸다. 다시 얼굴 모양이 나타나려나 하고 한참을 바라보아도 구름은 엉뚱한 그림만 그렸다.

얼마 전 나는 대상포진에 걸려 고생을 했다. 기력을 잃고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껍질 벗겨진 생명체처럼 흐느적거리고 누워있는데 남편은 운동을 해야 빨리 회복 된다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조금만 걸어도 머릿속이 근질해지며 땀이 줄줄 흘러 내려 목 줄기를 타고 흘렀다. 집에 올 때쯤이면 목수건이 푹 젖었다. 그래도 그의 팔에 의지해서 가다가 쉬고 조금 걷고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차츰 기운을 차리자 체육관을 돌아 근처 낮은 산으로, 다시 대공원을 반 바퀴 돌아올 정도가 되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대공원이 폐쇄 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갈 곳을 잃은 우리는 걸을 만한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다 하루는 갯골 생태공원을 가게 되었다. 앞이 탁 트인 시야에 잔디가 깨끗이 정돈되고 곳곳에 피어난 꽃들은 우울했던 마음을 걷어 가는 것 같다. 갯고랑에는 바닷물이 밀려와 찰랑대고 길가에 억새가 환하게 피었다. 갯벌을 발갛게 물들인 나문재,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밭은 내 마음을 바람처럼 흔들어 놓았다.

대공원을 옆에 두고 어쩌다 매일 아침 하는 운동을 여기까지 올게 무어냐고 투덜대던 나도 이제 새벽이면 당연히 갯골로 가는 줄 알고 남편을 따라 나선다.

그의 손에 의지하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석 달이 넘도록 매일 걷다보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쉬지 않고 그와 보조를 맞추며 걸어갈 만하다. 뒤에서 ‘탁탁’ 들려오는 발소리, 경쾌하게 옆을 스치더니 저만치 앞으로 뛰어간다. “젊음이 좋구나” 그가 한 마디 한다. 그래도 기다란 손을 활짝 펴든 억새가 우리를 향해 ‘잘 걷고 있다’고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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