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거실에 호박 한 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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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거실에 호박 한 덩이
  • 최일화
  • 승인 2021.01.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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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장흥진 시집 《야윈 당신》을 읽고 - 최일화/시인

시흥 문인들의 동인지 소래문학을 읽다가 처음 들어보는 시인의 시를 읽었다. 장흥진 시인이다. 이름이 남자 같기도 한데 여성 시인이다. 다른 곳에 살다가 근래 시흥으로 이사하여 소래문학 동인으로 참여한 듯싶다. 좋은 시는 독특한 시인의 개성이 나타나 있기 마련이다. 시인의 나이는 알 수 없으나 20대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2000년에 등단하고 지금까지 시를 쓰고 있는 걸 봐서 30년 이상 시를 써온 것 같다. 나는 인터넷서점에서 시인의 첫 시집 야윈 당신을 구입해 읽었다. 시가 맑고 깨끗하다. 열 권 이상의 시집을 낸 내가 잠시 부끄러웠다. 일생에 단 한 권을 내더라도 좀 더 심사숙고하여 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흥진 시 몇 편 함께 읽는다.



호박이 있는 풍경

멀리서 왔다
성자처럼 늙은 호박 한 덩이
흙먼지를 털고
보얗게 몸을 씻었지만
번쩍이는 고층 아파트 가구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매무새거실 한 귀퉁이에 정좌한 채
아찔한 빌딩 숲을 한없이 굽어보다가
밤에는 식구들과 늦도록 텔레비전을 본다

다 여물어서 고요하다

물과 햇빛으로 지은 노래는
노란 속살로 똬리를 틀고
짐짓 무심하다
다 여물어서 멍청하다


고향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풍경이 많다. 쏟아지는 매미소리, 장마철 논두렁 수로에서 잡아 올리던 송사리, 저녁노을 속 가볍게 흔들리는 수수이삭, 마을로 들어서는 길가에 줄지어 피어 있는 코스모스. 그리고 담장에 피어있는 호박꽃, 밭두렁에 자리 잡은 크고 둥근 늙은 호박도 낯익은 고향 풍경이다. 오늘은 도회지 아파트 거실에 앉아 있는 늙은 호박 한 덩이를 본다. 시인은 그 호박이 성자를 닮았다고 한다. 그 호박은 어쩌면 시인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시골에서 소박하게 자라 지금은 대도시에 올라와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호박처럼 도회지 풍경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호박은 물과 햇빛으로 노래를 지어 속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무심한 듯 멍청한 듯 아파트 숲을 굽어보고 있다. 세상은 다시 저 호박을 닮아가야 한다. 호박이 품고 있는 저 자연의 노래, 저 어리석은 듯 평화로운 본성을 되찾아야 하리라.



외투


사람 몸을 감싸던 책무責務는 이제 끝난 듯하다
소매 끝은 닳아 너덜거리고
장식 단추도 떨어져 나갔다
화사했을 황갈색 털빛은 때 묻어
추레하게 얼룩지고
깃도 주저앉은 체 해졌다
절집 마당 한쪽에 구겨져 엎드린 모습
다가가 살펴보니
사람의 몸 대신 오늘은 수도관을 안고 있다
제 몸태를 버리고
수도관의 구부러진 모양새를 따라
살집인 듯 달라붙어 있다
저렇게 완강히 그러안고 있으니
눈물 글썽이면서도
외로움은 더 이상 차가워지지 않고
따스한 속살을 지킬 것이다


산바람이 내려와
마당가의 감나무를 흔들자
가지에 매달려 밤새 추위를 견딘 별빛
우수수 쏟아져 낡은 외투 속으로 파고든다
세상에
보듬어 줄 새끼 아닌 것이 없다


한겨울 혹한이 몰아치는 절집 마당 한 모퉁이, 시인은 거기서 수도관을 감싸고 있는 낡은 외투를 본다. 그로부터 시인의 상상력은 발동한다. 사람 몸을 감싸는 책무를 다 마친 외투, 이제는 추레하게 얼룩져 수도관을 그러안고 외로움을 견디며 겨울을 나고 있다. 급기야 감나무에 매달려 밤새 추위에 떨며 우수수 외투 속으로 파고드는 별빛마저 보듬어 감싸주는 외투에게선 모성애마저 느끼게 된다. 모든 시에 사랑과 연민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백석의 시와 지용의 시의 다른 점으로 백석의 시에 깃들어있는 연민의 정을 꼽기도 한다. 추운 달빛마저 새끼처럼 품에 안아 보듬는 추레한 외투는 곧 시인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첼로

쓰레기장 입구
부서진 의자에 기대어 비 맞고 있다
줄은 낱낱이 끊어져 뒤엉켜 있고
활도 사라졌다
울타리 너머
큰길을 지나던 바람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헤어졌던 오랜 혈육을 만난 듯 달려들어
그의 눅눅한 몸을 얼싸안는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둘은 진흙탕 속으로 곧 나동그라질 듯하다

그가 평생 불렀던 노래는
다 어디로 갔을까
호들갑 떠는 바람이
그를 편히 눕히려고
안간힘을 쓰는 저 바람이
그 노래는 아닐까
세상을 돌고 돌아온
몸을 떨며
흐느끼듯 그의 전신을 적시는 빗물이그 노래는 아닐까

오늘 우리가 무심히 부르는 노래도
언젠가는
저렇게 살아 돌아와
처연히 우리를 눈 감겨줄까


첼로는 가장 인간의 육성을 닮은 악기라는 말을 한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망가진 첼로를 보며 시인은 탁월한 한 편의 시를 창작해낸다. 시의 재료는 첼로와 바람과 노래다. 지나가던 바람이 버려진 첼로를 만나 혈육을 만난 듯 얼싸안을 때 그것이 곧 첼로가 평생 불렀던 노래를 다시 만나는 순간 아닌가. 온 세상을 돌고 돌아 지상으로 내리는 빗물은 바로 첼로가 흐느끼며 부르던 그 노래가 아닐까. 바람과 빗물이 돌아와 다시 첼로의 노래가 되듯이 우리가 무심히 부르던 그 많은 삶의 노래들도 그렇게 우리의 육신이 낡아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위로가 되어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이 가득하다.



매듭

택배로 온 상자의 매듭이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방식으로 단단히 묶인 끈
보다 못한 딸아이가 칼을 건넨다

늘 지름길을 지향하는 칼
좌석표가 있다는데 일부러 입석표를 끊어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서서 가시며
그 근소한 차액을 챙기시던
어머니는 평생 지름길을 모르는 분이었다

상자 속엔 가을걷이하신
곡식과 채소가 들어있을 것이다
꾹꾹 눌러도 넘치기만 할 뿐
말끔히 닫히지 않는 상자를
가로 세로 수십 번 이 비닐 끈으로 동여매셨을
어머니의 뭉툭한 손마디가 떠올라
칼을 가만히 내려놓는다

힘이 들수록 오래 기도하시던 어머니처럼
무릎을 꿇고 늦
은 저녁까지 상자의 매듭과 씨름을 한다
이는 어쩌면 굽이진 어머니의 길로 들어가
아득히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린 날에는 이해되지 않던 험한 길 굽이마다
붉게 저녁노을로 걸린 어머니의 생애

옹이진 어머니의 매듭 같던 암호는
난해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풀어내고 보니
이음새도 없이 어머니의 길은 길고 부드럽기만 하다


어머니의 택배상자를 받은 화자는 가로 세로 수십 번 동여맨 포장 끈을 풀며 어머니의 한 생애를 생각한다. 택배상자의 내용으로 보아 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실 것이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지극한 정성처럼, 직접 지은 곡식과 채소를 단단히 포장하여 화자에게 보냈을 것이다. 얼른 풀리지 않는 매듭을 지켜보던 화자의 딸이 지름길로 찔러가듯 칼을 건네지만, 화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 늦게까지 포장 끈과 씨름을 한다. 비로소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화자, 포장 끈을 푸는 그 과정은 바로 어머니의 생애를 따라가는 길이라는 걸 안다. 힘겹게 풀고 보니 그것은 어머니의 생애처럼 길고 부드럽기만 하다. 단단하게 옹이진 매듭 같았던 어머니의 삶은 포장 끈처럼 이음새도 없이 길고 부드럽기만 한 길이었다는 걸 화자는 이제 깨닫는다.

이 시를 읽으며 시가 무엇인지,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잠깐 생각해본다. 시는 살아가는 과정의 언어적 표현일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은 지극하지만 시인은 그 보편적 사랑과 정성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낸다. 표현이 너무 풀어져 밀도가 떨어지면 감동의 요소는 그만큼 줄어 독자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만큼 예술성도 담보하지 못할 것이다. 언어 미학에 입각하여 시인의 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어머니의 사랑은 불멸하는 것으로 독자의 가슴에 오래 각인될 것이다. 동서양을 통틀어 어머니에 관한 수많은 시가 있지만 그 어떤 시와도 달리 표현된 이 시는 시인이 독창성이 십분 발휘된 명작임에 틀림없다.

시인 최일화

장흥진: 시인.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공주교육대학, 춘천교육대학 대학원 졸업. 2000시문학으로 등단. 아직은 좋아하는 시집이 최고의 소장품이며, 밝은 눈으로 시를 누릴 수 있음을 최고의 영예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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