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이 소학(小學)을 권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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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이 소학(小學)을 권한 이유
  • 송성섭
  • 승인 2021.02.23 1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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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4) 소남(邵南) 윤동규 선생과 소학(小學)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1695~1773) 탄생 325주년를 맞아 지난 12월 30일 인천 남동문화원이 기념사업준비위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연구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인천in]은 남동문화원의 소남 연구사업을 지난해 12월 [소남 윤동규를 조명한다]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특집기사로 소개했습니다. 이어 새해에는 소남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특집기사는 남동문화원 소남 연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송성섭 박사(동양철학)가 집필을 맡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공자는 배우기를 좋아했다. 이른바 공자의 ‘호학(好學)’이다. 그래서 『논어』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로 시작한다.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예기』라는 옛 서적에 의하면, “13세가 되면 작(勺)이라는 춤을 추었고, 성동(成童) 즉 15세에는 상(象)이라는 춤을 추었으며, 20세가 되어서야 대하(大夏)라는 춤을 추었다.” 나이가 듦에 따라 더욱 인문학적인 춤을 배웠던 것이다.

옛날에는 여덟 살 안팎의 아동들에게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소학(小學)이라고 하면 흔히 “어버이 날 나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네(父兮生我, 母兮鞠我)”라는 구절을 떠올리지만, 이는 사자소학(四子小學)으로써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소학(小學)과는 다르다.

 

소학(사진=두산백과)
소학(사진=두산백과)

소학(小學)은 주자(朱子)의 제자 유자징(劉子澄)이 주자의 지시에 따라 1187년에 편찬한 수양서이다. 『소학』은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것으로, 유학 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소학』이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라면,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학』은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으로 되어 있다. 입교는 교육하는 법을 말하는 것이고, 명륜은 오륜을 밝힌 것이며, 경신은 몸을 공경히 닦는 것이고, 계고는 옛 성현의 사적을 기록하여 입교·명륜·경신을 설명한 것이다. 가언은 옛 성현들의 좋은 교훈을 인용한 것이고, 선행은 선인들의 착한 행실을 모아 입교·명륜·경신을 널리 인용하고 있다.

소학의 공부를 성취한 학생들은 성균관(成均館)에 올라가서 대학의 도(大學之道)를 배웠다. 이들이 배웠던 과목이『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예기(禮記)』․『춘추(春秋)』⸱『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이었다.『대학(大學)』에 통달하지 않고서는 다음 과목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대학(大學)』은 이른바 3강령과 8조목이 핵심이다. 대학의 도(道)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과 친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善)에 머무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는 것이 소위 3강령이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가 바로 8조목이다.

소학(小學)을 배운 다음에 대학(大學)이라 하였더라도, 소학(小學)의 중요성은 결코 묵과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태종 7년인 1407년에 길창군 권근은 학문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소학(小學)의 글은 인륜(人倫)과 세도(世道)에 매우 긴절(緊切)한 것이온데, 지금의 학자(學者)는 모두 익히지 않으니 심히 불가(不可)합니다. 지금부터 경중(京中)과 외방(外方)의 교수관(敎授官)이 모름지기 생도(生徒)들로 하여금 먼저 이 글을 강(講)한 연후에 다른 글을 배우도록 허락하게 하고,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성균정록소(成均正錄所)로 하여금 먼저 이 글을 통하였는지의 여부를 상고하게 하여 응시하도록 허락하고, 길이 항식(恒式)을 삼으소서.”

 

또한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은 소학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여, 소학이 모든 학문의 입문이며 기초인 동시에 인간교육의 절대적인 원리라고 역설하였다. 그 자신은 일생 동안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하였으며,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한 바가 있다.

 

'인에 처하고 의를 따르는' 선비의 마음가짐을 표명한 소남의 문장
'인에 처하고 의를 따르는' 선비의 마음가짐을 표명한 소남의 문장

 

소학(小學)은 말이 소학(小學)이지, 결코 쉬운 학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소학이란 서적은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요긴한 말을 모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았다. 주자(朱子)는 소학서제(小學書題)에서 소학에서 가르치는 것이 “물 뿌리고 쓸며(灑掃), 응하고 대답하며(應對), 나아가고 물러서는(進退)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하고(愛親), 어른을 공경하며(敬長), 스승을 높이고(隆師), 벗을 친히하는(親友) 도리”라고 하였지만, 『소학(小學)』의 첫 머리는 “하늘이 명한 것, 그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며, 도(道)를 수련하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脩道之謂敎)”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학은 단지 지나간 과거의 흔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소학』의 「명륜(明倫)」은 어버이와 자식(父子)의 문제, 군신(君臣), 즉 정치적 지도자와 고위 관리의 문제, 부부(夫婦)관계, 장유(長幼), 즉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의 문제, 친구 사이(朋友)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 역시 현행적이기 때문이다.

소학의 현행성에 관한 예로 혼인을 들 수 있다. 혼인이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혼인은 두 사람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양가(兩家)의 문제이며, 가문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딸 자식을 시집 보내거나 며느리를 맞이할 때, 과연 어떠한 판단 기준에 따라야 할까?

안정호(安定胡) 선생이 말하였다. “딸 시집보내기를 반드시 내 집보다 나은 자에게 해야 하니, 내 집보다 나으면 딸이 사람을 섬김에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경계한다. 며느리 맞이하기를 반드시 모름지기 내 집만 못한 자에게 해야 하니, 내 집만 못하면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길 때 반드시 며느리의 도(道)를 지킨다.(『小學⸱嘉言』)”

소남 윤동규 선생도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기본으로 삼아 순서에 따라 배우도록 하였으므로, 7,8세의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모두 절하고 읍(揖)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을 알게 하였다. 그리고 1749년(己巳) 순암(順菴)이 동몽교관(童蒙敎官), 즉 서울의 태학(太學)과 사학(四學)에서 소학을 중점으로 교육하는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천거되자 소학을 보라고 권한 이도 바로 소남이었다.

 

“지금 장석(丈席)의 답서에, 《소학(小學)》을 보라고 권하셨기에 오늘 아침부터 읽기 시작하여 가르침을 받아들일 바탕을 마련하고 있습니다(答邵南尹丈書 己巳).”

 

이제 기나긴 겨울을 뚫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올해의 봄날은 유독 코로나 19 때문에 우울했던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봄날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2월 말부터 백신이 접종된다고 하니, 조만간 집합금지 명령이 해제될 날도 멀지 않았다. 바야흐로 남동문화원에서는 봄부터 소학 강좌를 연다고 한다. 비록 가치관과 인생관이 조선시대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더라도, 소학에서 언급하는 인문학적 자양분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인문학도로서의 자질을 길러봄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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