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학파의 개방성, 양명학과 마주하다
상태바
성호학파의 개방성, 양명학과 마주하다
  • 송성섭
  • 승인 2021.03.09 17: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5) 성호학파와 양명학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1695~1773) 탄생 325주년를 맞아 지난 12월 30일 인천 남동문화원이 기념사업준비위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연구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인천in]은 남동문화원의 소남 연구사업을 지난해 12월 [소남 윤동규를 조명한다]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특집기사로 소개했습니다. 이어 새해에는 소남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성호전집
성호전집

성호학파의 학풍은 개방적이었다. 성호 이익이 첨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이하진이 1678년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에 청제(淸帝)의 궤사은(饋賜銀)으로 사 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성립한 성호학의 출생증명서에는 이국(異國)의 문물에 대한 개방성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성호학은 또한 매우 포용적인 학풍을 띠고 있었다.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면 점차로 학문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기 때문에 풀리지 않은 의혹이 있으면 강습(講習)할 때 드러내거나 책자에 가만히 기록해 두었다가 깨치기를 구한 것이 성호학파의 학풍이었다. 그래서 의심을 품은 것은 다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학풍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성호학파는 도통(道通)에 관해서는 주자(朱子)-퇴계의 계보였다. 퇴계에 대해서는 조선의 주자라고 여기어서 퇴계의 어록을 가려뽑아 이자수어(李子粹語)를 편찬하였다. 퇴계와 고봉(高峯) 기대승이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에 관해 논쟁하자, 학자들의 학술이 어긋나게 되는 것을 걱정하여 성호 선생이 『사칠신편』을 지었다. 그런데 선생의 제자 신후담이 “공리(公理)의 희노(喜怒)는 이(理)의 발로”라는 설을 제기하자, 성호 선생이 그 설을 받아들여 『사칠신편』의 발문을 다시 지었는데, 끝에 가서는 퇴계로부터 멀어져서 고봉의 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사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본래의 자리로 되돌린 것은 소남 선생이었다.

성호학파가 입장을 정리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양명학이었다. 주자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을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한다. 반면에 왕양명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심학(心學)이라고 한다. 마음(心)에는 성(性)과 정(情)이 있는데, 주자는 이 중에서 오직 성(性)만이 이(理)와 맞닿아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왕양명은 마음(心), 즉 양지(良知)가 바로 이(理)라고 하였다.

 

왕양명
왕양명

성즉리(性卽理)와 심즉리(心卽理)가 주자학과 양명학으로 나누어지는 분기점이지만, 또 다른 분기점은 바로 사물과 마음과의 관계였다. 주자는 우리의 외부에 있는 사물들에는 각각의 이치가 있는데, 우리의 마음이 지니고 있는 지각 능력으로 그 사물의 이치에 도달해야 앎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외부에 있는 사물과 우리의 인식이 일치할 때 진리가 성립한다는 입장인데, 이러한 견해를 진리대응설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외부에 코끼리가 있다고 할 때, 실제로 있는 코끼리와 코끼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일치할 때 진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자
주자

그런데 왕양명은 사물과 우리의 의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분법에 반대한다. 우리의 의식은 사물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의식의 빛이 사물을 비추었을 때, 사물은 비로소 사물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무엇과 의식은 분리불가능하다. 심지어 의식조차도 의식에 대한 의식이다. 혹자는 아무런 사물이나 의식이 담겨있지 않은 멍한 상태가 사물과 분리된 의식 그 자체라고, 순수한 의식이라고 말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멍한 의식도 멍하다는 의식의 의식일 뿐이다. 만약에 의식 그 자체가 존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無)이리라. 예를 들어 보자. 우주에 존재하는 블랙홀은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블랙홀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던 조선 시대에는 블랙홀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리 의식의 지평에 블랙홀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블랙홀은 블랙홀이 된다. 왕양명은 이를 심외무물(心外無物)이라고 했는데,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는 것이다.

 

블랙홀
블랙홀

퇴계는 양명학을 부처의 견해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여겨 배척했다. 그런데 성호 선생은 성호사설 경사문(經史門)에서 “왕양명의 학설이 매우 편벽하나, 그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함인즉 또한 얕지 않으니, 백성에게 사납게 굴며 재물을 탐한 그러한 일이 있었겠는가? 내 왕양명의 십가패법(十家牌法)을 보건데 간악함과 거짓이 용납될 바가 없으니, 반드시 곧 실시할 만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성호 선생이 양명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퇴계와는 달리 양명학을 이단이라고 배척하지는 않았다.

성호학파의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경향 때문에 성호학파에는 서로 상충하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었지만, 성호 선생이 살아계실 때에는 선생을 중심으로 학파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질문하고 토론하는 도리에 있어서 의견이 같더라도 그저 같은 것이 아니었고, 다르더라도 그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호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는 지하에서 들끓고 있었던 마그마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766년 10월에 순암 안정복과 녹암(鹿庵) 권철신이 왕양명의 치지설(致知說)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지난번 자네가 이곳을 지날 때, 왕양명(王陽明)의 치지설(致知說)이 매우 옳다고 하기에, 내가 그때 나의 옹졸한 견해를 얘기해 줄까 하다가 심기가 흔들려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자못 후회가 되는군. 왕양명이 선유들에게 죄를 얻은 까닭도 바로 처음 공부의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이지. (…) 왕양명 연보(年譜)를 보면, 그가 자기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자기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 고기 먹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먹으라.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으면 그것은 마음을 속이는 일이라고 했다고 하니, 아아!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성인이 예를 만들 때 현자(賢者)는 너무 지나치지 못하게, 불초자(不肖者)는 발돋음하여 미칠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중도(中道)라는 것 아닌가. 양명이 사심(私心)을 가지고 제멋대로 주장한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가탄스러운 일 아닌가.”

그렇다면 소남 선생은 양명학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 순암 안정복과 마찬가지로 양명학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을까? 소남선생문집에는 권철신에게 답한 편지가 있는데, 어떠한 내용이 담겨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러나 그 부분은 아직도 해제되지 않아 연구가 필요하다. 소남 윤동규 문집에 대한 해제사업을 본격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