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 상상력 넘치는 리얼리스트가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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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상상력 넘치는 리얼리스트가 되는 일
  • 윤영식
  • 승인 2021.03.12 0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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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방, 그 너머의 기록]
(46) 독서의 즐거움 - 윤영식 / 딴뚬꽌뚬 책방지기

 

상상력을 가두는 세상에 독서를 허하라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에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소재로 하는 소설 한 권을 소개했습니다.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작가가 상상해 낸 허구지만, 그 허구는 현실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던 작가의 시선 위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기에 우리는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미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현실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이 책에 대한 소개글을 이런 말로 마무리지었습니다. “독자들이 시련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현실인식과 상상력 사이에서 찾아가길 바랍니다.”

 

딴뚬꽌뚬의 문학서가입니다. 문학은 상상력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제시해줍니다.
딴뚬꽌뚬의 문학서가입니다. 문학은 상상력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제시해줍니다.

 

저는 이 마지막 문장이 꼭 이 소설에만 해당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최근 저는 상상력이 부족한 사회는 책을 읽지 않는 사회라는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는데, 마침 이 책 덕분에 이 말을 할 자리를 얻었던 것입니다. 현실인식과 상상력 사이에서 길을 찾는 것, 저는 이것이 독서를 하는 가장 중요한 즐거움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제가 지금껏 살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은 『체 게바라 평전』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 제가 책을 고르는 방향과 책을 읽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책을 펼치면 독자들은 체 게바라의 멋진 초상 위에 쓰인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근사한 말을 읽게 됩니다. 꿈과 현실주의에 대한 체 게바라의 생각과 제가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 쓴 말이 비슷하지 않나요? 사실 그 글을 쓸 때 저는 체 게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 무의식적으로 체 게바라의 명언을 인용한 것만 봐도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머리와 가슴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새삼 곱씹어보게 됩니다.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지만, 이번 글쓰기를 통해 제가 하고 싶은 바는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리얼리스트와 공상가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상이지만, 저는 이 두 인물은 ‘책 읽는 사람’의 모습으로 서로 겹친다고 생각합니다. 책 읽는 사람은 꿈꾸는 리얼리스트이면서 현실과 대결하는 공상가입니다. 둘 중 한가지만 한다면 책읽는 일은 너무나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이 자세하고 실용적인 요리책이라고 하더라도 더 맛있는 요리를 상상하지 못 하는 사람에게 그 책을 펼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계급 간 격차에 대한 최소한의 문제의식도 없는 채 『타임머신』을 읽는다면 엘로이(빛의 종족)들을 향한 몰록(어둠의 종족)들의 분노가 느껴지는 실감나는 독서가 가능할까요? 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책읽기는 지루한 독후감 숙제에 불과합니다. 제게 즐거운 책읽기란 현실인식을하거나 심화시키고 동시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입니다. 상상력 넘치는 리얼리스트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제시했던 체 게바라가 독서광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저의 이런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사례 아닐까요?

독서광 체 게바라가 책을 읽을 때 현실을 깨닫는 것과 꿈의 세계로 날아오르는 것 중 어느 쪽을 더 중시했을지 제가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그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후자일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굳이 책을 보지 않더라도 살다 보면 결국 누구나 리얼리스트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늦든 이르든 사람들은 세상에 부딪히며 상처받는 끝에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리얼리스트는 몹시 불행한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론』 첫 페이지부터 “세상은 불행으로 충만해 있다”고 그냥 못박아버립니다. 무언가 다른 세상을 꿈꾸지 못하는 리얼리스트는 그저 그런 불행한 세상을 그 자체로 진리라고 납득해버린 사람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납득이 비난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1935년 사망한 안토니오 그람시는 한 정당의 지도자였지만 무솔리니 정권의 탄압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산산히 흩어진 정당, 파시즘에 정복당한 국가와 국민, 비좁은 감방과 병든 몸이었습니다. 그를 감옥에 집어넣은 판사는 “우리는 20년 동안 이 자의 두뇌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기까지 했지요. 이런 잔혹하고 부당한 처지에 놓였음에도 그람시는 감옥에서도 읽을 수 있는 한 책을 읽었으며 쓸 수 있는 한 글을 썼습니다. 그렇게 그가 세상에 남긴 글들은 『옥중수고』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이게 되는데, 그가 처했던 열악한 집필환경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 책에 엄청난 경외심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정치적 전략 구상들이 가득한 『옥중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리얼리스트가 쓴 책이라는 느낌을 팍팍 풍깁니다.

이 책에 담긴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 대한 치열한 분석에는 명백히 그 자신이 겪은 실패에 대한 냉정한 복기(復棋)와 평가가 전제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람시가 낙담과 원망, 후회를 풀어놓기 위해 글을 썼다면 그람시도 힘에 겨워 글을 끝까지 쓰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그람시가 죽기 살기로 글쓰기를 이어갈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몸을 가둔 감옥도, 심지어 거대한 감옥 그 자체였던 당시 이탈리아 사회조차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그의 상상력을 가로막기에는 그 벽의 높이가 턱없이 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사 자신이 파괴된다 하더라도 자신을 재창출할 수 있는 맹아를 유산으로 남기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것은 『옥중수고』에서 제게 큰 감동을 준 문장입니다. 그람시는 자신이 남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거침없이 자라날 수 있는 이탈리아 사회를 상상했기에 열악한 상황에서도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의 사회 분석은 이미 100여 년이나 지난 낡은 정보들에 불과하지만, 현실을 발판으로 상상하는 세상을 향해 도약하려는 그의 태도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의미를 전합니다.

 

이번에 소개하게 된 책들입니다. 『체 게바라 평전』, 『옥중수고』 모두 제게는 정말 의미가 많은 책들입니다.
이번에 소개하게 된 책들입니다. 『체 게바라 평전』, 『옥중수고』 모두 제게는 정말 의미가 많은 책들입니다.

 

그러니 뭔가 세상 일이 납득하기 어렵다면, 일단 책을 펼칩시다! 슬프다고 위로를 주는 책, 자신감이 없다고 자기계발서를 찾는 시시한 태도도 그만 둡시다. 소설이든 시든 역사책이든 과학책이든 어째 지금 당장은 나하고 관계없어 보이는 책이 오히려 좋습니다. 그 중에서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일지 궁금하게 만드는 책을 집어봅시다. 그리고 읽어봅시다. 너무 지루해서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지경이면 다른 책을 펼칩시다. 그렇게 이 책 저 책 바쁘게 찾아다니면,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문장에서 쇠창살 너머에 있을지 모를 세상을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쇠창살을 이해하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 쇠창살을 벗어나는 방법, 또 그 쇠창살을 벗어나 향해야 할 곳을 찾아가는 지혜와 용기는 분명 그러한 발견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제게는 가장 아픈 손가락들인 역사책입니다. '당장 나와 관계없지만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라면 단연 역사책들일 것입니다! 역사책들 많이 사랑해주세요!
제게는 가장 아픈 손가락들인 역사책입니다. '당장 나와 관계없지만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라면 단연 역사책들일 것입니다! 역사책들 많이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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