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가등정미소 파업 주동자 김응태를 발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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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가등정미소 파업 주동자 김응태를 발굴하다
  • 송정로 기자
  • 승인 2021.03.31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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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야 시인, 김응태(1900~57) 생애 발굴 '작가들' 봄호에 실어
장남 김정일옹(97) 1년여간 4차례 인터뷰
김응태(1900~1957)
김응태(1900~1957)

일제강점기 중구 신생동(현 동인천이마트 일대)에 있던 인천 가등정미소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항일독립지사였던 김응태(1900~1957)의 삶이 그의 장남 김정일(97) 옹의 구술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장남의 구술은 1930~40년대 일제 수탈의 현장인 인천항 주변 여러 정미소들의 노동실태, 선미 여공들의 동맹파업, 일경에 낙인찍힌 노동자의 삶, 그가 교류했던 조봉암, 이승엽의 생애, 당시 인천항 및 일대 답동, 용동, 신흥동 등 생활현장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보인다.

구술은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를 통해 잘 알려진 이설야 시인이 직접 나서 이뤄졌다. 그는 2020년 1월부터 2021년 2월까지 4차례에 걸쳐 김정일옹 만나고 현장답사를 함께했다.

구술 내용은 요약돼 인천작가회의의 계간 '작가들‘(2021년 봄, 76호) ‘민중구술’(그날 이후 우리는 하루도 편하지 않았지 - 인천 가등정미소 파업주동자 김응태의 생애 발굴) 제하로 게재됐다.

이설야 시인은 이 글을 통해 ‘장남 김정일이 들려주는 김응태 지사의 생애는 이제 겨우 발굴되어 공개하는 것이라 밑그림에 해당한다’며 김응태의 삶과 당시의 사회상을 촘촘히 정리해 나갈 계획임을 알렸다.

가등정미소
가등정미소
가등 작업복을 입은 김응태 지사
가등 작업복을 입은 김응태 지사

중구 사동 27번지에서 태어난 김응태 지사는 답동성당 아래에 있던 박문소학교(인천항 사립 박문소학교)를 1914년 졸업했다. 1919년 3월1일 직장 동료 열댓명을 데리고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그후 가등정미소 정미기계를 수리하는 철공반으로 들어갔는데, 파고다공원 3.1운동에 참가한 일을 누군가 밀고해서 일경의 감시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와 그의 가족은 하루도 편하지 못했다.

1927년 김응태는 이승엽의 주도로 결성된 인천청년동맹의 화정반 반장이 되었다. 1930년 1월 인천청년동맹 활동 등으로 그가 해고됐는데, 이로 인해 가등정미소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노동자 투쟁이자, 민족투쟁이었다. 며칠 후 그는 파업 주동과 사상단체 활동 혐의로 구속됐다가 이해 10월 풀려났다.

인천항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인천의 정미소들은 일제가 조선의 쌀을 수탈해가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그중 가장 큰 가등정미소(일일 생산량 3,200석)는 파업(7회 이상)도 가장 많았다. 가등정미소의 파업은 민족 차별에 대한 항의로 자주 일어났는데, 그 요구 조건이나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었다. 이로 인해 다른 지역의 노동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립운동가들이나 청년단체, 그리고 화요파(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일파)로부터 투쟁지원을 받기도 했다.

김응태는 이듬해 인천노동조합 청년부 활동을 하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고철사업을 시작했는데, 일경에 의해 장물 혐의라는 누명을 쓰고 다시 구속됐다.

김응태 지사는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발굴한 제5차 독립유공자 316명 중 한명으로 올해 3월1일 독립유공자로 서훈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장남의 기억을 풀어낸 ‘민중구술’에는 수업료를 못내는 박문학교 아이들의 이야기, 인천신사(神社) 의식과 경내에서 몰래 놀던 이야기, 사정옥(寺町屋) 냉면 배달부의 기막힌 기술, 수인사거리 일대 정미소 검사원들과 쌀표 이야기, 인천여상 골목길 모퉁이의 인력거 사무실, 율목동 리키다케정미소 사택 등 당시의 풍경과 생활현장의 이야기들도 많이 등장한다.

사정옥 앞 냉면배달부들 ©부평역사박물관
사정옥 앞 냉면배달부들 ©부평역사박물관
인천신사
인천신사. 『인천화도진도서관 소장 향토·개항 자료 도록2』 중에서

 

더불어 이번에 처음 소개되는 송봉기 지사도 구술에 등장한다. 김응태와 친해 동네에서 막걸리도 자주 함께 먹던 송봉기는 인천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1932년경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다. 상해에 파견돼 김단야와 협의하고 인천에서 적색노동운동 조직을 위해 노력했다. 1934년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했다.

1943년 김응태는 일제가 인천신사가 (화재에) 위험하다며 주변에 살던 사동 한국인 초가집들을 모조리 헐어버리는 바람에 용동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해방 후 신흥동으로 이사한 김응태는 풍(뇌졸증)으로 쓰러져 4~5년 누워 있다 1957년 10월 숨졌다. 신기촌(주안8동) 천주교 공동묘지에 안장됐으나 1970년 아파트 개발로 화장하고 산골해 무덤도 없다고 장남 김정일옹은 허망해 했다.

 

구술자 김정일옹
구술자 김정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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