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2년, 인천 남촌에 설립된 '살림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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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 인천 남촌에 설립된 '살림공동체'
  • 원재연
  • 승인 2021.04.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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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8) 소남 마을공동체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1695~1773) 탄생 325주년를 맞아 지난 1230일 인천 남동문화원이 기념사업준비위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연구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인천in]은 소남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원재연 박사,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 송성섭 박사(동양철학) 3분이 집필합니다.

 

잊혀진 인천의 실학자 소남 윤동규 선생의 행적을 밝혀서 인천사상 내지 인천정신의 근원을 해명하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에 부족한 필자가 외람되게 참여하게 되어 어깨가 무겁고도 감사하다. 이제까지 소남 윤동규를 포함한 조선후기 실학자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내신 허경진, 송성섭 두 분 전문연구자의 원고에서 소남 선생의 가계, 학통, 유물과 사상의 경향 등에 관한 포괄적 소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필자의 관심사는 조선후기 서학(西學) 수용과 천주교 도입의 과정 및 근대화 시기 전통 유학의 변용과 이에 조응하는 지역 공동체의 성장을 인천지역, 특히 소남 선생의 거주지에 초점을 맞추고 고찰하는 데 있다. 이번 회에서는 이러한 관심사를 해명하기 위해 우선 소남 윤동규 선생이 활동했던 조선후기 소남(=소성의 남촌) 마을에 대한 인문지리적 관점에서의 기초 조사를 간략하게 진행해 보고자 한다.

현재의 서울 마포구 도화동 부근에서 출생한 소남 윤동규 선생(1695~1773)이 1710년경 인천으로 이거하여 그의 후손들이 13대에 걸쳐 약 300년을 세거해 온 현재의 인천시 남동구 도림동 일대의 마을은 소남 선생이 거주하며 활동하던 터전이라는 점에서 ‘소남 마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소남(邵南)’이라는 호는 인천의 옛 지명 중의 하나인 ‘소성(邵城)’이라는 고을에 속한 ‘남촌(南村)’이라는 마을을 뜻하는데, 선생이 이곳으로 이주해온 이후부터 스스로를 규정하여 ‘소남촌인(邵南村人)’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경기도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편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경기도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편

 

‘남촌’이라는 마을 이름은 당연히 소남 윤동규 선생이 거주하던 18세기 초반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남 선생이 활동하던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현존하는 읍지(邑誌)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이러한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757년(영조33)부터 1765년(영조41) 사이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경기도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편에는 「방리(坊里)」 조가 있고 여기에는 ‘면(面)’ 단위로 지명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 중에 ‘남촌면(南村面)’이 부내면(府內面), 조동면(鳥東面), 신현면(新峴面), 전우면(田友面), 황등천면(黃等川面), 먼우금면[遠又尒面], 다소면(多所面), 주안면(朱岸面), 이포면(梨浦面) 등과 함께 인천도호부에 속한 10개 면 중에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그 위치는 도호부 관아의 남쪽 10리로 되어 있다.

 

『경기지(京畿誌)』(1842~1843)의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지도  [주의] 위 지도에서 위쪽이 남쪽이다.
『경기지(京畿誌)』(1842~1843)의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지도 [주의] 위 지도에서 위쪽이 남쪽이다.

 

1759년(기묘년)의 호구조사에 의하면 남촌면은 316호(戶)에 성인 남자 683명, 성인 여자 679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아의 남쪽 10리에 위치하고 있다. 소남 선생이 살던 남촌 마을도 이 남촌면에 속한다. 한편 이보다 약 32년 후인 1791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인천도호부에 남촌면을 비롯한 15개 면과 덕적진(德積鎭)이 편재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는 소남 선생이 별세하고 그 손자인 윤신(尹愼)이 살던 때이다. 이때 이미 고을 내 행정구역(면, 진) 숫자가 소남 때에 비해 60% 증가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각 면에 속한 동네 이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남촌면의 경우 1리, 2리, 3리, 4리로 기재되어 있어서, 이중에 남촌이 어디에 해당되는 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원호(元戶)는 359로 1759년에 비해 약 14% 정도 늘었으며, 인구는 1418명(성인 남630명, 여788명)으로 약 4% 정도 증가된 것을 알 수 있다.

소남 마을이 동네 이름으로 읍지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이후이다. 1842년부터 1843년 사이에 편찬된 『경기지(京畿誌)』에 의하면 「인천부읍지」 내에 ‘남촌면’이 부내면 등 다른 9개의 면과 함께 등장한다. 이때 남촌면에는 염촌(塩村), 냉정리(冷井里), 능동(陵洞), 논현리(論峴里), 도림리(桃林里), 오봉산(五峰山)(리), 고잔리(古棧里), 사리동(沙里洞), 여무실리(女舞室里), 발리동(發李洞), 경신리(慶新里) 등 11개의 동네가 편재되어 있다. 이중에서 ‘도림리’가 바로 소남의 후손들이 살고 있던 ‘남촌’이다. 이러한 동네 이름은 개항 직전인 1871년에 편찬된 『경기읍지(京畿邑誌)』 「인천도호부」 조에서도 변함이 없다.

소남 윤동규는 인천에 이사 온지 약 27년쯤 경과된 1737년 2월 17일자로 당시 인천 남촌(南村)의 도리산(道里山) 아래에 있던 최인성(崔仁性) 소유의 토지를 모두 71냥에 사들였다. 물론 이전에도 소남 일가가 경작해오던 전답이 이곳과 타지역 등 여러 곳에 상당수 있었으나 이때 다시 매입한 토지는 남촌 마을에서 소남 선생이 거주하면서 매입한 토지라는 점에서 재산 증식의 한 과정으로 주목된다.

이로부터 5년 후인 1742년 소남은 남촌에서 동계(洞契)를 설치하는데, 이미 70여년 전인 1670년대에 그의 증조부의 종형제 되는 윤명신(尹鳴莘)이 처가 쪽인 청주 한씨와 함께 설치한 동계를 쇄신한 것이다. 소남이 재설립한 동계는 ‘만신동계(晩新洞契)’인데 최초 설립 당시에는 그 취지가 살아 있었으나 소남 당시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효제(孝悌)’, ‘임휼(任恤)’의 목적을 되살려서 ‘상호부조(相互扶助)의 실익(實益)’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 규약은 향촌의 자치를 위해서 『주례(周禮)』에 나오는 ‘향팔형’(鄕八刑)이라는 향촌자치의 규율 중에서 ‘불효(不孝)’, ‘부제(不悌)’, ‘불임(不任)’, ‘불휼(不恤)’ 등의 자체 형벌 규정을 실시하려고 했다. 따라서 소남 선생이 1742년 재설립한 ‘만신동계’는 인천 남촌의 사족(士族)이 중심이 되는 경제공동체 내지 살림공동체, 또는 법률공동체를 조직하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허경진 교수가 최근 저술한 『소남 윤동규』(보고사, 2020)라는 단행본에 수록된 결과를 재인용하고 다시 정리해본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1737년 토지매매 문기에는 논[畓]은 하나도 안 보이고 성(聲)자, 영(靈)자, 당(堂)자 등의 이름을 가진 밭[田]만 여러 곳 나온다. 다만 이보다 1년 후인 1738년(무오년, 건륭3년)에 장손 신(愼)이 출생하자 이를 기념하여 며느리 정씨 앞으로 특별 분급한 토지 중에 당시 그가 소유했던 논과 노비가 나온다. ‘교하당(交河堂)’ 아래에 있는 건(建)자 답(畓) 7(?)두락(斗落) 13복(卜) 3속(束) 곳과 비(婢) ‘곱단이[古邑丹]’의 둘째 아이인 노(奴) 이준(二俊)이와 넷째 아이인 노 말준[末叱俊]이, 평안도 창성(昌城)의 노 이건(二建)이와 결혼한 양처(良妻) 소생의 노 월봉(月奉)이, 서울 사는 비 점상(占尙)이의 셋째 아이 노 선남(先男)이 등 4구를 모두 향후 그 소생들에 대한 소유권과 함께 수여한다고 되어 있다. 소남이 며느리 정씨를 통해 장손[윤신] 앞으로 떼어준 이들 논(7마지기)과 노비(4구)는 토지와 노동력으로 구성되는 개별 호구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본재산이었을 것이다. 향후 소남 종가에서 좀 더 많은 다양한 종류의 고문서들이 발견되어서 18세기 중반 소남 가문의 남촌 공동체의 경제 규모와 의식주 생활의 구체적인 수준 및 빈민구휼(貧民救恤)을 비롯한 상부상조의 실상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고문서(건륭원년 정월 13일 ‘분재기’)출전 : 허경진, 『소남 윤동규』(보고사, 2020) 중 67쪽
►고문서(건륭 원년 정월 13일 ‘분재기(分財記)'. 출전: 허경진, 『소남 윤동규』(보고사, 2020) 중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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