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와 소남이 이루려한 향촌공동체 - 인천 남촌의 만신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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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와 소남이 이루려한 향촌공동체 - 인천 남촌의 만신동계
  • 원재연
  • 승인 2021.05.24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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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10) 소남 마을공동체와 성호 이익 - 원재연 박사 / 인천학연구원
[인천in]은 잊혀진 인천의 실학자 소남 윤동규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특집 기획기사는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원재연 박사,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 송성섭 박사(동양철학) 3분이 집필합니다.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문학산 옆 남촌. 남촌 사람 소남은 이곳에 향촌공동체 건설을 펼쳐보였다. 

 

지난 번 글<4월20일자, (8) 소남 마을공동체>에서 필자는 허경진 교수님의 연구성과를 간략히 인용하여 1742년 인천 남촌에 윤동규가 설립했던 소남 공동체의 주요한 특징을 정리하고, 이에 덧붙여 17~19세기 행정구역 변천에 따른 소남 마을의 명칭 및 인구 변천과 관련된 기초 사항들을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소남 공동체의 설립과 운영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는 소남의 스승 성호 이익의 공동체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 글에서는 소남의 후배이자 절친이었던 순암 안정복의 동계(洞契)와 향촌 공동체 운영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소남 공동체의 연원은 소남의 증조부 윤명겸의 종형제인 윤명신(尹鳴莘)이 그의 처가인 청주 한씨와 함께 1670년대 무렵 인천 남촌에 설립한 동계였는데, 7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유명무실해지자 소남이 새로 규약을 정리하고 그 이름을 ‘만신동계(晩新洞契)’라고 붙였다. ‘만신동계’란 직역하면 “예전부터 내려오던 동계를 늦게서야 새롭게 고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소남은 ‘만신동계’를 재설립 또는 재조직하면서 사족이 모범을 보여 미풍양속을 주도하는 방법으로서 『주례』 「향팔형(鄕八刑)」 가운데 불효(不孝), 부제(不悌), 불임(不任), 불휼(不恤) 등 네 가지를 실시하자고 하였다. 이중에서 성호 이익과 관련하여 필자가 살펴볼 항목은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고 이기적인 욕심만 채우고자 하는 ‘불휼(不恤)’에 대한 처벌 내지 대책과 관계된 것이다.

또 소남은 한 마을의 구성원만으로는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힘들었던 세금, 부역, 상장(喪葬), 재난 등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두 마을(=자연촌)을 합하여 경제규모를 키워 대응하는 방법을 시험해보기도 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마을을 이상적인 향촌공동체로 만들어가려는 소남 윤동규의 이러한 시도는 세금, 부역, 상장, 재난 등의 문제에 대응하는 스승의 이익의 가르침 내지 사고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성호 이익의 공동체관은 국가공동체부터 고을 및 마을공동체까지 대소의 규모를 망라하면서 민중의 질고를 경감하며 공동체의 유지 및 운영에 해악이 되는 빈부의 격심한 차이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고, 토호가 세금이나 부역을 탈루하거나 양민을 사적으로 예속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는 것이었다. 또한 백성 모두가 농업, 상업, 공업 등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며 검소한 생활을 함으로써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튼실히 꾸려나가는 ‘살림공동체’를 지향하였다.

 

유형원의 반계수록 . 유원형은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정전제도(井田制度)를 꼽았다.
유형원의 반계수록. 유원형은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정전제(井田制)를 꼽았다.

 

조선 후기는 토지 생산에 기반을 둔 농업사회로서 사회적 부의 근원은 토지였다. 따라서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관리 및 토호들과, 소규모 토지를 소유하거나 남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는 영세 농민, 그리고 토지 소유는 고사하고 차경(借耕)할 토지도 없는 무토무전지민(無土無佃之民) 등으로 토지 소유가 분화하였다.

말 그대로 소수의 부자는 수백~수천 마지기를 가졌으나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송곳 꽂을 땅조차 없어서 농촌사회에서 쫓겨나 전국을 유랑 걸식하거나 산속에 들어가 도적이 되어야 했다. 이익은 이러한 토지 소유의 심각한 불균형을 해소해야만 빈익빈 부익부의 극단적 경제적 차별과 이에 따른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위화감을 완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익은 주나라 때의 정전제도(井田制度)를 이상형으로 여기면서도 정전제도가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은 맹자(孟子)의 활동시대에 벌써 제(齊) 나라, 등(滕) 나라 등에서는 이미 정전의 형태조차 사라진 사실로 미루어 정전제도가 중국에서조차 보급과 정착에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 정전법은 이미 고조선 때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도입하였으나 조선왕조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렸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익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주장한 사구법(四區法, 田자 모양으로 4등분하는 것)이 정전제도의 구구법(九區法, 9등분하는 법)보다는 좀더 현실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소유한 대규모 토지들을 국가가 몰수해야 하는데, 이는 ‘토지사유제(土地私有制)’라는 오랜 관습의 벽에 부딪혀 조금도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 앞에서 역시 정전법과 마찬가지로 시행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익이 고안해 낸 토지개혁의 골자는 판매 금지된 최소한의 보유 토지인 ‘영업전(永業田, 대대로 농사짓는 땅)’에 기반하여 토지 소유의 하한(下限)을 설정함으로써 농민이 토지로부터 축출되는 것을 막고, 지주와 영세농 간의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점차 완화해간다는 방안이었다.

이러한 이익의 균전론(均田論)은 송나라 임훈(林勳)이 『본정서(本政書)』에서 제시한 방법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임훈은 농부를 토지 소유 규모에 따라 1인당 50묘(畝)를 기준[正數]으로 삼아 50묘 이상을 가진 ‘양농(良農)’, 50묘 미만을 가진 ‘차농(次農)’, 차농보다도 더 영세한 ‘예농(隸農)’ 등으로 3분하였다.

양농은 ‘정전(正田)’인 50묘를 제외하고 남는 토지인 ‘연전(羡田)’을 팔 수 만 있고 더 이상의 연전을 사들일 수 없게 하였으나, 차농과 예농은 양농이 가진 연전을 사들일 수 있게 하여 정전을 만들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점차 토지 소유가 고르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전지(田地)의 균분과 함께 성호가 서민들의 경제적 수입을 보장하는 방안은 세금과 부역의 균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원래 토지소유자인 지주(地主)는 생산자인 농민(소작인)에게서 수확의 1/2만 소작료(小作料)만 받아낼 뿐 국가에 내는 세금과 종자, 비료 등은 자신이 부담하기도 되어 있었으나, 점차 세금과 종자, 비료 등 일체의 잡비도 소작 농민이 부담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작 농민은 심지어 자신이 수확한 생산물의 30~40%만을 차지할 수 있었으므로 생계유지가 극히 곤란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호는 농민이 국가에 수확물의 1/10만 토지세로 내는 ‘십일조’를 이상적인 형태로 삼았다. 또한 ‘군역(軍役)’과 ‘요역(徭役)’을 포함하는 ‘양역(良役)’에서 양반과 노비가 빠짐으로써 평민(양인)들에게 과중하게 부담이 전가되는 것을 ‘오불균’(五不均) 중의 하나로 지목하여 그 시정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는데, 이 또한 영세농민들로 구성된 민중의 생계를 최소한도로 보장함으로써 향촌의 살림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를 도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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