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하구 - 포구와 보호수, 굴곡진 역사를 품고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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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하구 - 포구와 보호수, 굴곡진 역사를 품고 흐르는
  • 장정구
  • 승인 2021.06.14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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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구의 인천하천이야기]
(41) 한강하구, 포구와 보호수 이야기
태풍 링링에 부러진 연미정 느티나무
태풍 링링에 부러진 연미정 느티나무

 

2020년 7월 19일 새벽, 탈북민이 헤엄쳐서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탈북민의 월북사건은 며칠 동안 날마다 톱뉴스를 장식했다. 월북한 사람은 개성이 고향으로 개풍군에 거주하다가 2017년 역시 헤엄쳐서 강화도로 내려왔던 사람이었다. 밀물과 썰물을 알고 이를 이용해서 월남도 하고 월북도 한 사람이다. 남쪽 사람들은 철조망으로 물때를 이용해서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점을 잊고 있었지만 이 사람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할 줄 알았다. 가방이 발견된 연미정 근처 배수로는 철조망으로 더욱 빈틈없이 틀어막혔다. 바로 앞 한강은 여전히 아래로 또 위로 흐른다.

한강은 임진강을 만나 조강이 되고, 조강이 김포반도 끝에서 남쪽으로 염하, 서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그 모습이 제비의 꼬리를 닮았다고 그 위치에 세워진 정자를 연미정(燕尾亭)이라 했다. 고려시대 처음 세워진 연미정은 한강하구에 위치하여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조선 중종 때 삼포왜란에서 공을 세운 황형 장군의 유적지가 있다.

정묘호란 당시 인조는 강화로 피신했고 연미정에서 후금과 형제 관계의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10년 후 병자호란 때 강화로 피신하지 못한 인조는 한강변 삼전도(삼밭나루)에서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했다. 한강과 연미정 느티나무는 그 역사를 모두 지켜봤다. 2019년 태풍 링링에 연미정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만 뿌려졌다. 남은 느티나무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연미정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하며 한반도 역사의 중심에 있던 나무라 많는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대명항, 신덕포, 원머루나루, 갑곶나루, 강령포, 조강포, 마근포, 전류리포구, 운양나루, 감암나루, 섶골나루... 한강에서 조강으로 또 염하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김포반도에만 적어도 11개의 포구와 나루가 있었다. 마근포와 조강포, 강령포는 지금은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대명항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수많은 배들로 활기찼을 포구의 예전 모습을 찾기 어렵다. 전류리 포구도 어선만 몇 척 정박할 뿐이다.

한강하구 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 포구에서 물때를 기다렸다가 배를 띄워야 했다. 그래서 포구들이 여럿이었다. 강을 건너기 위한 나루이기도 했고 한강을 거슬러 한양까지 뱃길의 기항지이기도 했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 인천앞바다 그리고 황해로 이어지는 뱃길은 물때에 순응해야 했다. 염하를 통해 삼남지방으로 나갔고 어떤 배들은 교동으로 벽란도와 황해도로 오갔다. 또 어떤 배들은 오두산을 돌아 밀물에 임진강을 거슬러 연천 고랑포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박신선생묘역 앞 향나무
박신 선생 묘역 앞 향나무

김포 조강리에는 애기봉전망대가 있다. 조강 건너 개풍의 조강리까지 불과 1.5㎞ 거리다. 애기봉 아래에는 박신 묘역이 있다. 박신 선생은 고려말 조선초 사람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조선건국 원종공신이다. 세종 때 지금의 김포인 통진에 13년 동안 유배되었고 지금의 강화대교 인근에 성동나루(석축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통진과 강화 갑곶진 사이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내리기 위해 물에 빠져야 하는 것을 보고 사재를 털어 나루를 만들었다.

묘역 앞에는 선생이 심신수양을 위해 심었다는 500년 수령의 향나무가 있다. 또 인근 가금리 길가 언덕에는 둘레 7미터 넘는 한 쌍의 느티나무가 450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길 건너에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도 솟아 있다. 느티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들메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성동리, 보구곶리, 가금리, 시암리, 석탄리, 마곡리, 신곡리로 이어지는 한강 옆 마을마다 보호수들이 많다. 마을의 행복과 평안 기원과 함께 위험한 한강과 조강, 황해 뱃길의 무사안녕을 염원하는 뱃사람들의 마음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가근리 길가 보호수 느티나무 한쌍

굴포천과 한강이 만나는 신곡양배수장 옆에는 영사정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정조가 김포 장릉으로 행차할 때 경치가 아름다워 영원히 생각나겠다며 영사정(永思亭)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16세기부터 시작된 남원윤씨의 영사정 묘역이 지척이다. 왜란 후 불과 40년도 지나지 않아 호란으로 또다시 국토는 전쟁터가 되고 백성들은 환란을 겪어야 했다. 1637년 병자호란 때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중 삼학사도 병자호란 때 죽었다. 대쪽같은 삼학사(三學士) 홍익한, 윤집, 오달제이다.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며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심양에 끌려가 죽은 윤집 선생의 빗돌이 남원 윤씨 영사정 묘역 화중원이 있다.

 

태풍에 부러진 연미정 느티나무는 반닫이로 다시 태어났다. 살아서 500년 세월, 다시 태어나서 남은 느티나무와 함께 앞으로도 천년을 연미정과 조강 그리고 바다와 육지의 이야기를 이어가기를 기원한다. 역사는 흐른다.

 

굴포천이 한강과 만나는 신곡리에서 바라본 계양산
굴포천이 한강과 만나는 신곡리에서 바라본 계양산
신곡리 경주임씨 묘역의 향나무. 2004년 보호수로 지정됐다.
신곡리 경주임씨 묘역의 향나무. 2004년 보호수로 지정됐다.
남원 윤씨 영사정 묘역의 삼학사 윤집선생 비석
남원 윤씨 영사정 묘역의 삼학사 윤집선생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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