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구역, 화수동의 작은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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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구역, 화수동의 작은 책방
  • 문서희
  • 승인 2021.07.02 16: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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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방, 그 너머의 기록]
(62) 떠나야 할 우리동네 이야기 - 문서희 / '책방모도' 책방지기
책방 모도 앞에 나란히 앉아 봄나물을 다듬는 할머니들. 정겨운 화수동 풍경.
책방 모도 앞에 나란히 앉아 봄나물을 다듬는 할머니들. 정겨운 화수동 풍경.

 

책방 모도가 자리 잡은 화수동은 재개발 구역입니다. 최대한 오래 이곳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싶지만 재개발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언젠가는 화수동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야 하는 일보다 더 서글픈 것은 우리 동네가 이대로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찾을 수 없는 곳을 그리워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매일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오지만 이럴 때일수록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우리 동네 이야기를 기록해보기로 했습니다.

 

책방 모도 옆집 라일락 나무가 만개한 풍경. 라일락 향기로 가득한 화수로47번길.
책방 모도 옆집 라일락 나무가 만개한 풍경. 라일락 향기로 가득한 화수로47번길.

 

저는 화수동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추운 겨울 눈이 내리면 너나 할 것 없이 빗자루를 들고나와 골목을 쓸고 빙판길에 넘어져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제설 작업을 합니다. 집집마다 마당에서 기르는 나무와 화분, 옥상 텃밭을 정성스럽게 가꾸는 덕분에 코끝으로 계절의 변화를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넉넉하게 만들어서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며 안부를 묻기도 합니다.

 

책방 모도 옆집 라일락 나무가 만개한 풍경. 라일락 향기로 가득한 화수로47번길.
화수동 길고양이들의 따뜻한 보금자리, 은혜미용실

 

화수동의 다정한 이웃 ‘민들레국수집’은 갈 곳 없는 노숙인들을 위해 따뜻한 한 끼 식사를 제공합니다. ‘창작집단 도르리’는 동네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편히 쉬다 가는 화수동의 동네 카페이자 사랑방입니다. ‘은혜미용실’은 길고양이들이 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만들고 깨끗한 물과 사료를 넉넉히 채워둡니다. 사람과 동물이 더불어 사는 법을 저는 화수동에서 배웠습니다.

더불어 사는 법은 화수동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970년대 만석동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과 임금 착취, 차별 대우에 저항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노조 여성 지부장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회사의 편에 선 어용노조는 그들에게 똥물을 뿌려 가며 방해와 폭력을 일삼았고, 군사정부 또한 그들을 탄압했습니다.

 

약한 것을 강하게, 72년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총회 당시 사진
약한 것을 강하게, 72년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총회 당시 사진

 

동일방직 노동운동의 중심에는 화수동의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습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고 연대하며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동일방직 노동운동은 한국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어려운 이웃과 연대하는 가치로 남아 여전히 화수동 골목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들레국수집, 창작집단 도르리, 은혜미용실, 책방 모도와 함께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동네가 낙후되었다고 합니다. 낡은 건물을 허물고 아파트를 짓자고 합니다. 저는 우리 동네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 동네가 낡았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철거해야 할 것은 낡은 건물이 아니라 낡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낡은 생각으로는 더불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낡은 생각으로는 어려운 이웃과 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낡은 생각에 균열을 내는 책을 읽고 소개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재개발 구역의 작은 책방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느 날의 출근길 풍경. 손잡고 발맞추어 함께 걷는 아름다운 두 사람의 뒷모습.
어느 날의 출근길 풍경. 손잡고 발맞추어 함께 걷는 아름다운 두 사람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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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2021-07-04 23:46:12
정말 정겨운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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