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품격을 높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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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품격을 높이는 길
  • 이성재
  • 승인 2021.08.2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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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기고]
(5) 이성재 / 인천자주평화연대 상임대표

품격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사람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또는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다. 사람에게서 품격은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이나 사는 집, 그리고 먹는 음식 따위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 사람 내면의 충실함과 도덕성에서 비롯된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오늘 어떻게 살아가는 지에서 느껴진다.

그렇다면 ‘도시의 품격’은 어디에서 결정될까? 마천루나 거대한 건축물은 볼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품격을 결정하는 요인은 아니다. 도시의 품격은 ‘이야기’에서 나온다고 본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를 잇고, 내일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도시의 품격이 높아지고 지역과 도시의 정체성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천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한때 어떤 정치인이 “이부망천”이라는 소리를 해서 인천사람들의 분노를 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부분적인 진실만을 담고 있었다. 서울의 배후도시로서 수도권 사람들이 먹고 살고, 그리고 버리는 것까지 뒤치다꺼리해온 것이 인천의 역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짠물’로 표현되기도 했고, 공업도시 노동자도시로 인식되기고 했다.

최근에야 인천공항과 송도 신도시가 들어서고 거기에 바이오산업 핵심기업들이 들어오고, 상대적으로 낮은 아파트 가격 때문인지, 뒤늦게 아파트 가격이 폭등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인천 곳곳에 40층, 심지어는 50층 높이의 초고층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다. 멀리 보이던 산과 바다가 이제는 거대한 아파트 병풍에 가로막혀 답답함을 더해 주고 있다. 초고층 아파트 높이처럼 도시의 ‘가격’은 높아질지 모르지만 도시의 ‘품격’은 거꾸로 낮아지고 있다.

인천이라는 도시는 19세기 후반, 개항 때부터 일제 강점기와 근대 산업화시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와 경관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그 옛날 교역이 시작될 때부터 서울(한성)로 드나드는 물자들을 수송했던 물류의 중심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천은 대한민국 그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인천만의 것’을 가지고 있다.

 

인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말
인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말

 

인천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이었지만 개항될 때부터 들어선 건물이 여전히 살아 있어 그때의 모습을 아스라이 보여주고 있다. 김구 선생이 해주에서 끌려와 인천감옥소에서 노역을 나갔던 부두도 여전히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제 모습 일부를 가지고 있고, 기능도 하고 있는 곳이 인천이다. 강경애 소설 ‘인간문제’의 주인공 ‘선비’가 인천으로 올라와 다니던 공장과 출퇴근길이 여전히 그곳에 있고, ‘난쏘공’의 은강과 기계도시가,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곳이 바로 인천과 동구 만석동이다.

개항 때부터, 그리고 해방 후 본격적으로 근대 산업도시로 발전해 온 인천에 당연히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당연히 착취와 억압, 그리고 저항이 필연적이었다. 노동운동이 시작되었다. 1962년 선교사 조지 오글 목사가 동일방직과 대우중공업, 이천전기 등 공장이 가까이에 있는 화수동에 초가집을 사들여 산업선교를 시작한 곳이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일꾼교회)의 시작이었다. 동일방직을 비롯해서 대성목재, 한국유리, 대우중공업, 이천전기, 삼원섬유, 반도상사 등 숱한 사업장에서 억압과 탄압을 받는 노동자들에게는 피난처이자 쉼터였고, 사랑방이었으며, 학교였다. 85년 대우자동차 투쟁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도 일꾼교회의 숨은 역할이 지대했다. 합법적인 노동단체가 있을 수 없었던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때 하루에도 수 십 개씩 만들어진 노동조합 뒤에는 인천산선(일꾼교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인천산선(일꾼교회)의 역할은 노동운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국제법학자회에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게 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했다는 이유로, 당시 조지 오글 목사는 체포되는 당일 강제출국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80년 5월 광주학살의 참상을 인천지역에서 제일 먼저 전파한 곳도 인천산선(일꾼교회)이었다. 87년 6월 항쟁 당시 인천지역에 뿌려졌던 숱한 유인물 중 상당수는 인천산선(일꾼교회)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땅의 민주주의 발전에 혁혁한 공헌과 역할을 해왔다. 대한민국 정부가 조지 오글 목사님뿐만 아니라 2대 총무를 역임한 조화순 목사님, 그리고 대학졸업 후 노동간사를 역임한 김근태 전 국회의원에게 무궁화훈장을 수여한 것은 바로 인천산선(일꾼교회) 활동에 근거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도 6~70년대 먹고 사는 문제가 절박한 시대를 지나,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질을 고민하는 시대로 진작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낡은 것, 오래된 것들을 뒤떨어진 것, 버리고 없애야 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복고니, 레토르 감성이니 해서 현대적 의미로 되살려 가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부응해 도시마다 근대산업유산을 되돌아보고 살려내는 운동이 활발하다. 그런 점에서 인천은 그 어느 도시보다 근대역사유산의 보물 같은 곳이 많다. 그 근대문화유산을 살려가는 방식은 재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일부 지주와 건설사의 탐욕에 굴복해서, 낡았다는 이유로 다 쓸어버리고 그것을 박제화 해 표지석이나 박물관의 유물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현대화 하는 도시와 함께 낡은 것은 고치고 새롭게 탈바꿈시켜 이야기를 보존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도시개발이자 품격 있는 도시로 발전하는 것이다.

최근 인천지역 근대역사유산 중 전국적으로 인천산선(일꾼교회) 뿐만 아니라 동일방직과 부평 조병창 병원건물 등이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이곳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 양반들이 살았던 북촌 한옥마을만이 소중한 곳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그리고 지금까지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살고 있는, 낮지만 깔끔한 건물들과 좁지만 정겨운 골목들로 이루어진 화수동 화평동, 만석동 송림동 동네들도 서울 삼청동 익선동만큼이나 충분히 오늘에 되살릴 만한 가치가 있다.

도시의 품격은 시민 한 명 한 명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삶이 거리와 지역으로, 공간과 건물로 연결되고 쌓여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시는 살아 있고, 도시는 기억한다. 도시의 기억이 우리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인천이라는 도시의 역사를 어떻게 써 갈 것이며, 인천의 품격을 어떻게 살려 갈 것인가를 묻게 되는 요즈음이다.

 

이성재 인천자주평화연대 상임대표
이성재 인천자주평화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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