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인천 일꾼들의 역사,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상태바
살아있는 인천 일꾼들의 역사, 인천도시산업선교회
  • 나지현
  • 승인 2021.08.25 10: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릴레이 기고]
(7) 나지현 / 전 일꾼자료실장

 

동일방직에서 시작된 여성노동자의 길

2020년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진행되는 많은 행사중에 토크 콘서트의 진행을 하게 되었다. 인천산선(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수년간 근무했던 인연과 인천에서 87년 이래 계속 노동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써 진행을 요청받았고 별 고민 없이 바로 수락하였다.

토크콘서트의 출연진은 정말 제목에 합당한 사람들이었다. 인천산선하면 연관 검색어로 떠오를 만한 내용인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정명자선배, 동일방직 노동자도 아니면서 여성노동자에 대한 연대의 마음으로 50만이 모인 부활절 예배에서 단상을 점거했다 구속되었던 인천의 대표적인 여성노동운동가 김지선 선배, 그리고 80-90년대에 노동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가 해결하고 중재하곤 했기에 인천의 노동과 관련한 큰 사건마다 그 이름이 들어있었던 이민우 간사님(개인적으로는 필자의 직속 상관이었다.)이 옛 이야기를 나눌 분으로 출연했다.

또한 후배 노동자로는 우리 사회에 곡 필요한 필수 노동을 하면서도 가장 대접받지 못하여 스스로 노동조합을 통해 권리를 찾고 있는 대표적인 중장년 여성노동자인 청소노동자와 요양보호사가 함께 한 뜻 깊은 자리였다. 10월이지만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아침부터 동일방직에서 시작한 일정으로 지칠 만도 하였으나 담쟁이가 빨갛게 단풍 든 일꾼교회 건물 앞에서 찬바람 맞으면서 정말 소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진 공연도 누군가 끓여온 돼지감자차의 온기로 버티면서 끝까지 자리를 지킨 선배님들이 자랑스러웠다.

(그 내용이 궁금한 분은 2021년에 인천민주화운동센터에서 펴낸 『내가 살아온 이야기 –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마지막 장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길)

 

80년대 노동자들의 버팀목, 인천 산선

나의 인천에 대한 기억들은 대부분 인천산선과 함께 시작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노동자로, 시민으로 산 것은 인천이다. 이십 대의 후반부부터 함께 하였다. 그래서 내가 산선과 딱 붙었던 시절의 산선을 소개하려 한다.

87년에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때도 회사는 부평에 있었지만 회사나 경찰의 감시없이 마음 편히 복사하기 위해 화수동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유인물을 복사했다. 어디 우리 회사만 그랬겠는가. 당시의 많은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이 인천 산선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87년 이전에도 엄혹한 독재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자료를 얻고 모임을 할 수 있었던 곳은 민중교회였고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일꾼교회라 불리었던 인천산선이었다. 87년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정신없이 파업농성을 하고 나서 교육을 받기 위해 모였던 곳도 일꾼교회 2층이었다. 주일 낮에는 예배를 보는 곳이지만 다른 시간에는 문을 열어 노동조합 간부들이 서로 사례를 나누고 다른 지역의 소식도 듣고 노동조합에 대한 뒤늦은 교육을 받고는 하였다.

또 산선은 직업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취업을 위한 기술로 용접도 가르치고 미싱도 가르쳤다. 87년 이후에는 해고자들의 쉼터이기도 했다. 옥상에는 가건물이지만 해고자협의회가 있어 87년에 많이 나온 해고자들이 모여 서로 추스르고 다음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또 새로 노동조합을 만드는 이들을 위해 상담하고 지원하는 곳이었다.

지하에는 풍물과 노래를 배울 수 있는 공간과 강사들이 있어 노동문화를 이어나갔다. 그 전에는 지하에서 무료 치과진료가 있었다. 일꾼자료실에서는 노동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쓴 교재를 만들었고 『일꾼의 노래』 라는 노래책도 수차례 발간하였다.

 

6년을 이어온 노동자들의 학교 일꾼역사교실

87-88년까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많은 노동조합이 단기간에 만들어졌고 교섭과 투쟁은 하지만 노동조합을 꾸려나갈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사회의식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다. 인천 산선은 이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상담소들과 함께 월례강좌를 진행하였고 매회 백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지만 좀 더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의 지도자로서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90년부터 일꾼역사교실을 진행하게 되었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기치하에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가르쳤다. 학교의 체계를 갖추어서 진행하였고 교장, 교감, 담임교사 등의 체계를 갖추고 정규수업과 함께 보충수업도 진행했다. 입학식, 졸업식은 물론이고 중간에 현장학습으로 강화도 역사기행을 다녀오는 등 정말 학교처럼 진행하였다. 강의만이 아니라 시청각 교재도 보여주고 함께 토론하며 생각을 나누고 담임선생이 개인면담도 진행하는 이상적인 8주간의 학교였다. 교사로 거쳐간 사람도 많았고 일년에 두차례씩 12회기로 진행되어 졸업생 숫자가 500명이 넘었다. 한때 노동조합 간부 중에 절반은 안다고 할 정도로 많은 노조간부들이 함께 했고 서로 교류하는 시간이었다.

일꾼역사교실 교사를 했던 사람들은 인천 산선을 거친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유명한 이도 있고 각자의 영역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졸업생 또한 그러하다. 1990년 가을에 찍은 강화도 역사기행의 기념사진을 보면서 지금 인천 뿐 아니라 전국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을 오랜만에 발견하고 흐뭇했다.

 

1990년 가을 일꾼역사교실 2기 역사기행, 강화도에서

 

좁지만 큰 공간 인천산업선교회의 소중함

10월의 토크콘서트 이후에 다시 산선에 몇차례 가게 되었다. 김정택 목사님 단식 중에 갔고 다시 전 일꾼역사교실 교사로 독보적인 대중적 역사강사인 후배가 릴레이 단식하는 날 방문하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토요일이라 한산하였다.

지하부터 3층까지 찬찬히 돌아보았다. 후배와 ‘여기가 이렇게 좁았나’ 하는 얘기를 했다. 이곳이 전에는 그렇게 넓어 보였다. 인천 산선 2층의 강당은 87년에 노동자가 갈 수 있던 곳 중에 가장 넓은 교육장이었다. 57평이라는 곳, 좁지만 크게 역할을 했고 살아있는 역사가 지속되고 있는 곳,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그 자체가 역사이다. 노동현장의 민주화, 인천의 민주화를 품고 노동자들의 버팀목의 역할을 했던 공간을 이제 인천시민이 지켜야 할 것이다.

 

나지현 전 일꾼자료실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