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을 품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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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면’을 품는 민주주의
  • 임승관
  • 승인 2021.09.0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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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세상] 임승관 /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 대표
http://db.kookje.co.kr/news2000/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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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 대해 세계인들이 느끼는 인식은 매우 긍정적이며 호기심 또한 늘고 있다. 코로나 19에 대처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과 최근 영화 같은 아프가니스탄 탈출과 구출은 선진국다운 국가 시스템뿐만 아니라 한국사람 성향에 대한 관심으로도 확대하는 게기가 됐다. 그동안 동양인에 대한 평가는 자율을 중시하는 서구 개인주의 보다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단주의라는 인식 틀 안에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한국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적인 집단주의에 속한 개인은 집단이 세운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한 내 역할이나 위치가 있다.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또 만족한다. 이 만족은 내 역할이 아닌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두거나 내 위치보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대한 질투나 시기심을 잘 느끼지 않게 한다. 하지만 집단주의의 부정적 특성은 남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보아도 나서서 돕거나 관여하지 않는 이유도 정당화한다. 동양인으로 한국 사람은 집단주의처럼 보이지만 자세하게 보면 좀 다르다 ‘관계주의’다.

관계주의는 내가 지금 누구와 있는지 또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내 존재의 성격이 바뀐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주체성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체면’은 아주 중요한 요인이다. ‘체면’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남들에게 보여 평가받는 것에 의해 좌우되는 체면이 있고, 단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모습으로 유지하거나 잃을 수 있는 체면이 있다. 전자를 ‘사회적 체면’이라고 하고 후자를 ‘개인적 체면’이라고 한다.

얼마 전 춘천에서 생활문화 지원 사업에 참여 예산제도를 도입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내려간 적이 있다. 전년도부터 이 과정을 수정하고 보완해 가며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공모사업에 선정된 팀들의 사업 예산은 삭감되어 지급된다. 지원자들의 신청 예산을 합하면 전체 지원 예산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최종 지원 사업비는 외부 심사위원들의 심사에 맡겨 삭감 액수를 결정하다. 절차적인 규범과 정당성은 갖추었다. 하지만 왜? 라는 민원은 점점 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공모 선정제도를 시도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보통 지원금의 참여 예산제도는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한 지원팀들이 모두 모여 결정한다. 함께 서로의 사업내용과 예산 계획서를 보며 각자 사업 예산을 스스로 조정한다. 이렇게 해서 신청 예산의 합이 지원 예산을 넘지 않게 조정되면 지원액을 함께 확정하는 것이다.

그해 춘천은 1차 선정팀이 많아 방역과 효과적인 합의를 고려해 이 틀로 나누어 진행했다. 첫날은 선정팀이 하나의 큰 원 모양으로 앉아 진행했다. 모든 팀은 다른 팀 사업 계획서와 예산을 비교하고 검토할 수 있다. 이는 내 예산이 전체적으로는 어느 수준인가를 알기 위해서다. 예상 시나리오는 각자 줄일 수 있는 사업비를 찾아 스스로 줄이고, 이렇게 모인 사업비가 지원할 수 있는 예산을 넘지 않을 때까지 두세 번 반복하는 것이다. 자율적인 합의를 이루고 재단은 그대로 지급하는 것이었다.

예상은 빗나갔다. 많은 팀이 초과한 지원예산을 고려해서 팀 사업비를 줄여 취합을 반복해도 전체 예산을 여전히 웃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충분히 예산을 줄여 희생? 했다고 생각하는 팀은 드러나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임승차에 대한 불만과 불신감을 느꼈다. 내가 줄이지 않아도 다른 팀들 중 많이 줄이는 곳이 있으면 최종 확정될 수 있다고 기대하는 선정팀이 있는 것이다. 또 스스로 예산을 줄이려니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현도 나왔다. 나만 순진한 바보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자 초과 사업비를 1/N으로 나누어 그 액수 이상을 줄인 팀은 집에 가겠다는 제안까지 나오고 분위기는 더욱 긴장되었다. 결국 문화재단이 추가 예산을 1/N으로 나누어 공평하게 삭감하고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제3자 중제를 택한 것이다.

둘째 날도 어제만큼 선정팀이 모였다. 이번에는 자리 배치를 어제와 달리 큰 원이 아니라 4~5팀씩 여러 모둠으로 나누었다. 그 외 진행은 전날과 같았다. 초과 예산을 공개하고 서로 다른 선정팀의 사업과 예산 계획서를 공유했다. 그리고 줄여야 할 사업비 예산을 모둠 단위로 알려주었다. 어제와 달리 개인이 아닌 모둠 미션이 된 것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같은 모둠에 속한 사람들은 우선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이 기획한 사업을 소개했다. 서로 경청하고 질문도 했다. 그러다 보니 개별 팀 사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공감도 되었다. 어느 모둠은 구성원들이 동의해 모둠 중 한 팀 예산을 전혀 줄이지 않는 모둠도 나왔다. 나머지 팀들이 조금 더 양보하여 그 팀을 돕기로 하고 모둠 총액을 맞춘 것이다. 사업에 필요한 공연자나 프로그램 강사 정보도 서로 공유하여 예산을 아끼는 아이디어도 내고 협동 프로그램 제안과 결정도 다양하게 일어났다.

첫날과 둘째 날의 차이는 자리 배치 변경과 모둠 미션을 추가한 것 외에 없다. 하지만 결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선정팀들이 모인 것도 아니다. 물리적인 환경만 바뀌었다. 내가 누구와 있는지에 따라 자신의 선호와 태도가 바뀌는 우리가 지닌 ‘관계주의’가 일으킨 효과다. 우선 첫날 참여자들이 느낀 환경은 나와 대상화된 다수가 눈치를 보는 경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남들이 얼마나 사업비를 줄일지 알 수 없어 내 기준을 정하기가 힘들고 불편했다. 만약 내가 사업비를 많이 줄이는 이타심을 발휘해도 남들이 알아봐 줄 수도 없다. 남들에게 보이는 것으로 평가받는 사회적 체면이 구겨지는 것이다. 체면과 소통에 관한 연구를 보면 이 경우 사회적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는 갈등을 일으켜 진지한 논쟁을 피하거나 제3자의 조정에 맡겨 자신의 체면을 지킨다고 한다.

둘째 날은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가까운 모둠 배치로 환경이 바뀌었다. 자신의 능력이나 인품을 상대방의 반응으로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거리다. 이는 갈등보다는 협력전략을 쓰고 건설적인 논쟁을 하며 쌍방향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었다. 개인체면을 세우는 환경이다. 학자들은 사회체면보다 개인 차원의 체면을 중시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고 한다. 개인 성찰이다. 개인 성찰을 통해 남과의 비교가 아닌 스스로 윤리적이고 품위 있는 내실을 쌓는 노력을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사회제도 차원의 노력이나 시도가 일으키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간과한 대안이다.

지금 유행하는 다양한 ‘주민참여’제도도 주민을 모으는 것에만 치중하면 충분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어떻게 참여 환경을 기획하고 선택을 설계했는가가 중요하다. 서양이나 아시아 주변 나라와도 다른 우리 ‘체면’ 의식을 알고 활용해서 풀뿌리 민주주의도 선진국이라는 외신을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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