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배우는 교실 - 먹과 붓으로, 교구가 놀이감 되어
상태바
함께 배우는 교실 - 먹과 붓으로, 교구가 놀이감 되어
  • 이정숙
  • 승인 2021.10.07 07: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모 속 동그라미]
(10) 이정숙 / 인천구산초교 교사, 인천교육연구소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가끔은 아니 아주 종종 아이들에게서 배운다. 사실은 학교란 서로 배우고 함께 사는 공간이다.

서예 시간이다. 처음 먹과 붓을 본 아이들에게 먹의 농담(濃淡)과 번짐을 통해 미적 감각을 익히는 시간이다. 먹이란 조금만 튀어도 자국이 남기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대형 사고가 날 수 있어 김샘은 먹을 다루는 시간은 늘 긴장을 한다. 아이들에게도 몇 번이나 주의사항을 안내하곤 하지만 언제나 사고는 나는 법. 더구나 코로나 상황에서 가름막을 하고 움직임도 불편한 상황에 ‘먹으로 자유롭게 놀기’라니. 코로나 상황이 아니라면 전지 크기 종이를 펼쳐 놓고 정말 자유롭게 모둠 활동을 하며 먹의 농담을 표현할 수 있겠지만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먹으로 농담을 표현하는 일은 어려운 도전 과제였다.

김샘은 아이들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일이 자리를 돌며 먹물을 접시에 부어 주고 또 물을 나눠주면서 문제 발생을 최대한 차단하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처음 접하는 붓질이 신기했는지 숨도 안 쉬고 자신의 작품세계로 몰입해 갔다. 그런데 교사의 성급함으로 처음부터 먹에 풍덩 붓을 담근 터라 적은 양의 물로는 농담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이미 담근 붓이 먹을 잔뜩 머금고 있어 김샘이 교실을 돌며 다시 물통에 물을 더 부어 주어 붓을 헹구어내도 옅게 표현이 되지 않았다.

 

김샘: 흠! 붓을 빨아야 하나. 먹의 위력을 당해낼 수가 없네. 옅게 해 본 다음에 붓끝으로 조금씩 먹물을 묻혀가며 농담을 조절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짙은 것부터 해서 흐리게 만들기가 어려워. 어쩌지?

민재: 선생님 이거 되는데요? 이렇게 하면 돼요.

민재가 보란 듯이 말한다. 나눠준 물티슈에 먹을 닦아가며 옅게 만들면서 농담을 표현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난처함에 아이는 어떻게든 과제를 수행하느라 묘안을 짜낸다. 덕분에 다른 아이들도 민재 말대로 물티슈로 먹을 닦아가며 신기해하면서 즐겁게 먹의 농담을 표현하는 작가들이 되어간다.

먹의 양을 조절하지 못해서인지 찢어질 듯 잔뜩 먹물을 머금고 있는 얇은 화선지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들 몇몇이 눈에 띄였다. 한참을 말리고 나서 다시 그려야 했다.

김샘: 흠, 말려야겠네. 조금 쉬었다가 마른 다음에 더해 보는 게 낫겠는데? 마를 때까지 좀 기다리자.

김샘이 교실을 돌며 다른 친구들 그림을 봐주고 있는 새 창가 쪽이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어느새 양달 창문 턱에 모인 아이들이 자기 작품들을 널어 말리면서 떠들고 있었다. 김샘이 쳐다보니 목소리 큰 성우가 대뜸 자랑스레 말한다.

성우: 선생님, 여기가 종이 말리는 맛집이에요. 내가 말리니까 다들 따라왔어요.

가만히 앉아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리다 지친 아이들은 과감히 자리를 벗어난 성우를 따라 하나씩 둘씩 창가에 모여 자기 작품들을 말리고 있었다. 김샘은 소란스러워진 상황을 평정하느라 성우와 아이들을 야단치려다 성우의 생각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얇은 화선지라 금방 말라버린 작품들을 보며 속으로 ‘헙, 아이디어들이 좋은데. 진작에 창가에 말리라고 할걸’. 하며 감탄을 했다. 아이들의 소란을 잠재우려는 데에만 늘 신경을 쓰느라 합리적인 방법들을 놓치곤 한다.

다행히 이번 시간에는 먹으로 인한 대형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먹물이 튀어 우는 아이도 교실에 엎질러 번진 먹물도 없었다. 코로나 덕분인지 아이들도 조심하는 게 습관이 된 탓도 있으려니 감사해하고 있었다. 반면 다른 반은 복도부터 화장실까지 먹물이 뒤범벅된 채 난리가 나 있었다. 정신없는 옆 반 샘 대신 복도를 닦고, 돌아다니는 옆 반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다보니 김샘은 몇 년 전 서예시간 풍경이 생각났다.

무사히 수업을 마치고 하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청소하시는 분이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김샘에게 달려왔다. “으악! 선생님 여기 좀 와 보세요”. 김샘이 화장실로 달려가서 보니 아이들은 먹을 닦는다는 명목으로 휴지를 풀어내서는 물에 뭉쳐서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었고 천정과 벽에는 온통 물을 먹은 휴지 뭉치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어이가 없었던 김샘은 아이들을 혼내고 그 휴지뭉치를 떼어내느라 며칠을 고생고생했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혼나고도 금방 웃으며 즐거움을 곱씹고 킬킬거렸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혼나고 기죽어 또 심통을 부리면 어쩌나 했는데 그래도 금방 풀어지니 다행긴 해.’ 라는 생각이 들어 나중엔 금방 풀어지는 아이들이 고맙기까지 했었다.

아이들은 교사가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다. 각자 쉽게 썼다 지우는 작은 화이트보드를 가지고 있는데 퀴즈시간이나 학습활동에 늘 활용되는 교구이다. 아이들은 그걸로 마치 메시지 판처럼 떨어진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한다. 교구가 놀잇감으로 응용된다. 교실이 놀이공간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몇 년 전 수학 교구로 수막대 블럭 큐브를 구입해서는 아무 말 없이 놀이함에 놓아 둔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 큐브를 하나씩 꺼내 이리저리 끼워보고 놀더니 다양한 모양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점점 시간이 지나자 모양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더 역동적인 장난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김샘이 놀이시간을 가만히 보니 잔뜩 모여서는 팽이를 만들어 돌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몰입하고 있는 모습을 보다 김샘은 너무나 역동적으로 놀잇감을 만들어내는 아이들 모습이 재밌어 여러 가지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었다. ‘큐브를 해체하기, 오래 돌리기, 주어진 시간에 팽이 만들고 돌리기, 큐브 수 제한하기’ 등등 다양한 게임규칙을 만들고, ‘개별 참가, 팀참가’ 등 종목을 만들어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었다. 팽이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친구들 써포터즈 팀을 만들어 응원을 하기도 했다. 여자 아이들은 자기 팀 응원을 하기 위한 플랭카드 만들기와 치어리더를 자처하기도 했었다. 마치 대회선수처럼 연습시간까지 확보하면서 처음엔 장난 같았던 놀이가 점점 커지고 진지해져 갔다. 김샘 역시 상장도 만들고 상품도 준비하면서 뭔가 굉장한 행사를 치르는 기분이 들었다.

김샘은 종종 자신을 소개할 때 ‘인천에서 아이들과 공부하는 교사 김샘입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아이들에게서 실마리를 얻고 아이디어를 얻기 때문이다. 김샘은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