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영세자' 이승훈 -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상태바
'최초 영세자' 이승훈 -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 황효진
  • 승인 2021.10.07 08:00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효진의 역사기행 - 길을 걷고 뜻을 묻는다]
(4) 이승훈, 한국 천주교의 시초 - 황효진 / 공인회계사, 전 인천도시공사 사장

 

천진암 천주교 성지 내 권철신 권일신 이벽 이승훈 정약종의 묘
천진암 천주교 성지 내 권철신 권일신 이벽 이승훈 정약종의 묘 (사진 황효진)

 

- 이승훈, 성인도 복자도 아니었다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르 2세가 집전한 성인 103위 시성식이 있었다. 2014년 8월에는 광화문에서 프란체스코 교황이 집전한 복자 124위 시복식이 열렸다. 그런데 우리에게 ‘최초의 한국인 영세자’로 잘 알려진 이승훈(李承薰)의 이름이 103위 성인 명단은 물론 124위 복자 명단에도 없다. 뜻밖의 일이다.

이승훈은 1784년 2월 북경 북당 성당에서 프랑스 신부에게 영세받은 ‘최초의 한국인 신자’로서 그해 겨울 이벽(李檗)과 함께 교회를 창립한 주역이었다. 더욱이 그는 1801년 2월 26일 조선에 천주교를 확산시킨 ‘원흉’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된 권력의 희생자였다. 한날한시에 참수되었던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 홍교만 등 다른 5인은 모두 복자로 시복을 받았다. 그런데 베드로 이승훈만이 성인이나 복자의 반열에 끼지 못했다. 한국 천주교의 새벽을 연 이승훈이 순교자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승훈의 죽음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그의 삶에는 어떤 굴곡이 있었을까? 그의 꿈과 열정, 갈등과 좌절 그리고 죽음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천진암 천주교 성지에 있는 이승훈의 초상
천진암 천주교 성지에 있는 이승훈의 초상

 

- 믿음의 새벽을 열다

이승훈의 꿈과 열정의 현장부터 찾아 나섰다.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처음으로 시작된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터다. 이벽의 집터 표지석은 청계천변에 있는 전태일 열사 기념관 앞에 있었다. 문득 믿음의 새벽이 열린 곳에 노동의 새벽도 열렸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 터.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이다. 그 앞에 전태일 기념관이 있다. (사진 황효진)
이승훈의 인물 관계도
이승훈의 인물 관계도

 

그곳에서 이승훈의 청춘 시절을 소환했다.

이승훈은 1756년 9월 서울 반석방(盤石坊: 현재의 중림동 약현성당 부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동욱이 영조의 탕평책으로 남인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할 때였다. 어머니 여주 이씨는 실학자 이익의 조카인 이용휴의 딸이었다. 이가환이 어머니의 동생이니 이승훈은 이가환의 조카다. 이 때문에 이승훈은 어려서부터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은 교육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찍부터 서학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천문학과 기하학에 정통한 외삼촌 이가환의 영향을 받아 수학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가 청년 시절에 학문적 서학에 머물지 않고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된 인연은 따로 있었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입구. 앞에는 서소문 밖 형장이 있다. 이 근처에서 이승훈이 태어나고 처형되었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입구. 앞에는 서소문 밖 형장이 있다. 이 근처에서 이승훈이 태어나고 처형되었다. (사진 황효진)

그의 혼인으로 맺어진 이벽(1754-1785)과의 만남이었다. 이승훈은 1776년 20세가 되던 해 정약용의 친누이와 결혼을 함으로써 정약용의 배다른 누이와 결혼한 이벽과 동서 사이가 된 것이다. 무과 출신 집안의 이벽은 벼슬자리에 관심이 없는 구도자(求道者)였다. 이벽은 경기도 광주 천진암에 독서당을 차려두고 유교 경전 뿐만 아니라 <천주실의>와 <칠극> 등 한문 서학 서적을 깊이 연구하며 스스로 천주 신앙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1779년 겨울 서울에서 광주 앵자산까지 홀로 눈 덮인 길을 걸어서 권철신이 주도한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반면에 이승훈은 1780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의 신분으로 대과를 준비하고 있는 성균관 유생이었다. 그런데 이승훈의 운명을 바꿔 놓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북경행 여행이었다. 1783년 어느날 이벽은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행 서장관으로 북경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따르면 그는 이승훈에게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갈 것을 권유하며 말했다.

 

“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 들어, 그 종교의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수학 등 서학에 흥미를 갖고 있던 이승훈은 이벽의 제의에 솔깃했다. 그는 1783년 10월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동지 사신단에 합류했다. 수학자를 비롯한 학자 선교사들이 가장 많은 북경의 천주 북당을 찾아 갔다. 선교사들에게 수학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에게 수학책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건네주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점차 그의 관심이 수학보다 천주교 신앙 쪽으로 향했다. 그는 천주교 서적을 읽고 서양 선교사들과 필담으로 그리스도를 알아갔다. 마침내 그는 신앙에 귀의하게 되고 필요한 교리를 배운 후 북당의 마지막 예수회 출신인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받기를 청했다.

 

천진암 빙천수. 권철신이 주도한 강학회 참석자들이 신새벽에 일어나 세수하였던 얼음같이 찬 샘물. (사진 황효진)

 

북경 북당 천주당.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받은 곳이다.
북경 북당 천주당.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받은 곳이다.(사진 중앙일보 신경진 특파원 제공)

 

중국에서 전교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그라몽 신부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주기 전에 그에게 다짐하며 물었다.

“ 만일 조선의 왕이 너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승훈이 서슴치 않고 말했다.

” 천주를 분명히 알게 된 이상 천주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형벌과 죽음까지도 감수하겠습니다“

그라몽 신부는 이승훈에게 조선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伯多)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서울 반석동에서 태어난 이승훈이 북경 북당에서 조선의 반석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1784년 봄 서울로 돌아온 이승훈은 이벽과 의기투합했다. 둘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북경에서 가져온 진도자증(眞道自證) 등 교리서적과 7성사 해설책, 기도서와 성인전 등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마음 속 깊이 들어오자 전교활동을 시작했다. 이벽은 당대 최고의 성호학파 학자인 이가환과 천주 논쟁을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처남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물론 스승인 권철신에게까지 전교를 감행했다. 이벽의 전교가 있은 지 얼마 후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물론 양평에 머물고 있던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이를 계기로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성호 좌파 인물들이 근기(近畿) 지방은 물론 호서와 호남 지방에 광범위한 신앙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784년 겨울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정약전과 정약용, 권일신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훈이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조선에 신앙의 문을 처음 연 사람이라는 의미로 세례명을 요한(若翰)이라 하였다. 세례자 요한과 베드로의 합작으로 조선의 천주 신앙의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 갈등과 통회가 시작되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그들은 너무도 빨리 예상된(?) 암초를 만났다.

1785년 3월 명례방 장례원 앞을 지나던 형조 소속 포교(捕校)들이 역관 김범우 집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승훈, 이벽, 정약용, 정약전, 권일신, 김범우 형제 등 여러 사람들이 모여 교리공부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찬송과 기도 소리였다. 포교들은 노름꾼들을 체포할 생각으로 예배 현장을 덮쳤다. 젊은 유생들의 신앙공동체가 세상에 커밍아웃팅되는 순간이었다. 이벽, 이승훈, 정약용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세 집안의 아버지들이 아들을 감시하는 체제로 돌입했다.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아들 앞에서 자살 기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벽은 사실상 집안에 감금되었다. 이벽은 석연찮은 이유로 급사했다.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은 가족들 보는 앞에서 북경에서 가져온 한문 서학 서적들을 불태우고 아들 이승훈은 천주교를 배척하는 글과 시를 짓기도 하였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도 아들을 감시하기 위해 마제에서 회현동 아들의 집으로 달려왔다.

가족들만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성균관 유생들도 그들을 비난하는 통문을 돌렸다. 이승훈 일행이 전교 활동 후 처음 겪은 고난이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이승훈의 전교 의욕이 꺾인 것은 아니었다.

이승훈은 이벽의 부재를 대신해서 전교 활동의 지도자로서 입지를 견고하게 다져나갔다. 1786년에는 신부 10명을 임명하는 가성직(假聖職) 제도를 도입했다. 그로 인해 천주교인의 수도 부쩍 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성직 제도는 신앙상의 문제를 야기했다. 신품성사의 인호(印號:세례, 견진, 신품 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새겨지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 표지)를 받지 않은 신부의 임명은 독성죄(瀆聖罪)가 될 수 있다고 신앙 공동체 내부로부터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급기야 가성직제도가 폐지되었다. 천주교인의 활동은 급격하게 위축되고 이승훈의 지도력 상실도 불가피했다.

남인 공서파(功西派)와의 갈등이 고조되는 사건도 터졌다.

1787년 가을 성균관 반촌에 있는 김석태의 집에서 이승훈은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 교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 성균관에서 함께 대과를 준비하던 이기경이 불쑥 나타났다. 이승훈과 정약용은 과거 시험 공부 중이라고 핑계를 댔지만 서학에 반대해 온 이기경은 그들이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이내 눈치챘다. 이러한 사실은 곧 공서파의 대표주자인 홍낙안에게 알려지면서 이기경과 이승훈 및 정약용의 사이는 악화되어 갔다. 갈등과 좌절 그리고 죽음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종각 앞 공평동 의금부 터
종각 앞 공평동 의금부 터 (사진 황효진)
의금부도. 1792년 의금부 도사로 임명된 겸재 정선이 신고식으로 그린 '금오(의금부)계첩'이다
의금부도. 1729년 의금부 도사로 임명된 겸재 정선이 신고식으로 그린 '금오(의금부)계첩'이다

 

얼마 전 종각 건너편 공평동 의금부 터를 서성거렸다. 사화와 당쟁으로 이곳에 끌려온 조선의 ‘얼굴’들이 스쳐갔다.

신유년(1801년) 2월 천주교인 검거 선풍이 대대적으로 불어닥쳤다. 그때 의금부에 끌려온 ‘서학 삼흉(西學 三凶)’이 있었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 남인 출신 관료들이다.

그들은 약 보름 동안 의금부 나리들로부터 사흘에 한번씩 곤장을 맞아가며 생사를 결정지을 말들을 토해냈다. 결국 이가환(60세)은 자결했고 이승훈(46세)은 처형당했고 정약용(40세)은 살아남았다. 이가환은 며칠 동안 심문을 받으면서 ‘사악한 천주교인’으로 지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마침내 곡기를 끊고 삶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러나 이승훈과 정약용은 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같다고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니는 공서파의 공세 속에서 의금부에 끌려간 정약용은 살아남는다. 반면 천주교 신자들로부터도 고립될 정도로 천주교로부터 떠나있던 이승훈이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교회공동체를 함께 이끌어간 두 사람 모두 이미 벼슬길에 들어섰던 배교자였지만 그들의 생존을 위한 의금부 대응 전략은 완전히 달랐다. 다시 말해 위기대응 전략의 차이가 한 사람은 생존의 길로, 다른 사람은 사망의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닌 지 모르겠다.

 

- 배교 코스프레의 전략적 목표

처음 저주받을 짓을 한 자는 대대로 벌을 받는다고 하는 ‘시작용자(始作俑者)의 덫’에 걸린 것일까? 이승훈은 북경에서 서학 서적을 가져와 천주교를 최초로 전파한 주범으로 천주교 관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소환되었다. 1785년 3월에는 지금의 명동 성당 부근에서 마리아 상 등 성물을 갖추고 공동체 모임을 하다 우연찮게 형조 관원에게 탄로나 포도청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때 이승훈은 앞에서 자기 집 마당에서 서학 책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과 벽이시(闢異詩)를 짓는 배교 코스프레를 연출했다. 그 이후 이승훈의 활동을 감안하면 이때의 배교 코스프레는 전교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공서파의 줄기찬 공격에 대응하는 데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승훈은 이 배교 코스프레를 죽을 때까지 되풀이했다.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할 때나 천주교를 떠났을 때나 대외적으로는 1785년의 을사 추조 사건 직후 서학 책을 불태우고 벽이문을 제출한 것을 늘 자기 변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1791년 11월 진사 윤지충의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을 계기로 홍낙안과 이기경 등 공서파의 공격이 있을 때에도, 1795년 4월 주문모 신부 체포 미수사건 때에도, 1801년 정조 승하 후 노론 벽파들이 남인을 숙청하고 천주교인을 대대적으로 탄압할 때에도 그랬다. 다시 말해 전교를 위한 배교 코스프레는 본인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한 탄압의 국면에서도 생존전략으로 사용된 것이다.

 

진산성당. 신해년(1791년) 폐제분주 문제로 순교한 윤지충과 권상연을 기념한 성당이다. (사진 황효진)

 

- 생존 전략으로서의 배교 코스프레

생존 전략으로서 배교 코스프레 전략이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1791년 공서파의 총공세에 대응한 이승훈의 배교 코스프레 변론이 최종 판결자 정조에게 먹혀들었다. 이승훈을 공격한 홍낙안과 이기경이 오히려 삭탈관작을 당하고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때 이승훈도 평택 현감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말이다.

 

”홍낙안(洪樂安)의 문계(問啓) 가운데 저를 모함한 것이 무릇 세 조목입니다. 하나는 책을 사왔다는 것이고, 하나는 책을 간행했다는 것이고, 하나는 성균관에서 회합했다는 것입니다.

책을 사왔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계묘년(1783년) 겨울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가서, 서양인이 사는 집이 웅장하고 기묘해서 볼 것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사신들을 따라 한 차례 가보았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바로 자리를 파할 무렵에 서양인이 곧 <천주실의> 몇 질을 각 사람 앞에 내놓으면서 마치 차나 음식을 접대하듯 하였는데, 저는 애초에 펴보지도 않고 돌아오는 여장에다 넣었습니다. 그리고 말이 역상(曆象)에 미치자 서양인이 또 <기하원본(幾何原本)> 및 <수리정온(數理精蘊)> 등의 책과 시원경(視遠鏡), 지평표(地平表) 등의 물건을 여행 선물로 주었습니다. 귀국한 뒤에 뒤적여 보았습니다만 점차 말들이 많아지자 을사년(1785년) 봄에 제 부친이 종족(宗族)들을 모아놓고는 그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여러 의기(儀器)들도 역시 전부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도 드디어 이단을 배척하는 글을 지어서 통렬히 배척하기를 남김없이 하였습니다.

책을 간행했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낙안의 문계(問啓)를 본 뒤에야 비로소 책을 간행했다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는 비단 아무 증거가 없는 것일 뿐만이 아닙니다. 공연히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 낸 뒤 억지로 남에게 씌우면서 그가 모를 리가 전혀 없다고 한다면 어찌 천하에 살아 남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가 한 말을 그가 반드시 스스로 알 것입니다.

성균관에서 회합했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경자년(1780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 성균관에 들어가 원점(圓點)을 한 것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인데, 그가 꼭 정미년(1787년) 겨울이라고 말한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책을 태운 뒤로는 애당초 한 권의 책자도 없었고 보면 책을 끼고 갔다는 말이야말로 정말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그 증인으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그 친구인 이기경(李基慶)이고 보면 이미 공평한 증인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기경의 생각이 음험하고 말하는 것이 허황된 것은 낙안보다도 열 배나 됩니다.

이미 절친한 친구가 아니고 또 그런 사실도 없고 보면 이 역시 혼자 나서서 증거를 대고 허구를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단을 물리치는 글은 을사변 봄에 지었는데, 원래의 초고는 평택(平澤) 부임소에 가지고 가서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제 공술을 드리자니 정신이 혼미해서 전편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을 말한다면 ‘천하의 학문은 정사(正邪)를 가릴 것 없이 이해(利害) 관계가 있은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을 기울여 따르게 마련이다. 만약 서학(西學)에 천당(天堂), 지옥(地獄)의 설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어찌 패관 잡설(稗官雜說)보다도 못하게 여겼겠는가.’라고 한 것이 있고, ‘서양에서 온 학술은 반드시 천당과 지옥으로 주를 삼아 천하의 수많은 사람들을 기만한다.’라고 한 것이 있고, ‘서학에 가짜 천주(天主)가 횡행한다는 말이 있으니, 요사스럽고 허망하기가 이와 같은 것이 없다. 이미 하늘이라 말하면서 가짜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내가 반드시 그 학설로 그 학설을 깨겠다.’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이 글과 시야말로 제가 이단을 물리친 뚜렷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공자 문묘 앞 성균관 입구
공자 문묘 앞 성균관 입구 (사진 황효진)

 

신해년(1791년) 11월 8일 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승훈 진술의 일부다.

허구를 날조한 사람은 사실상 이승훈이었다. 이승훈은 이때 주장한 것과는 달리 북경에 가서 자진하여 천주교 교육을 받고 영세까지 받은 것은 물론이고 서학 관련 종교서적과 성물들을 잔뜩 사서 돌아왔다. 더욱이 북경으로 가기 전에 이벽으로부터 신앙 서적을 구입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기경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 일도 있다. 그뿐만 아니다. 이승훈은 후에 평신도회장을 지낸 최창훈과 함께 한문 서학 책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일도 도맡아 했다. 정미년(1787년)에는 성균관 인근 마을 반촌에서 정약용과 함께 서학 서적을 보며 교리연구를 하다 우연히 이기경에게 들킨 것도 사실이다. 이승훈은 이 모든 사실을 숨기거나 부인하며 역으로 홍낙안과 이기경을 무함(誣陷)하는 자로 몰아세웠다. 이승훈의 지나친 역공이 나중에 더 큰 화근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정약용이 걱정했을 정도다. 한마디로 이승훈의 배교 코스프레 전략은 거짓말 전략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새빨간(?) 거짓말로 한때의 친구를 무함하면서까지 자기 변론을 해야 했을까? 또 어떻게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고 최종판결자인 국왕의 눈을 속일 수 있었을까? 우선 후자에 대한 답변은 일차적으로 그의 주장에 반증할 증거나 증인이 적었기에 가능했을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정조가 속아(?)주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자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진산사건이 터질 무렵 천주교 내부에서는 벌어진 신앙 상의 문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90년 10월 의금부 도사로 관직으로 나아가기 전까지만해도 이승훈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을사 추조사건 이후 이벽의 죽음을 계기로 권일신, 정약용 등과 함께 교리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교황청의 정식 승인 절차 없이 자신을 포함해 10명의 신부를 임시로 임명하는 가(假)성직 제도까지 도입하여 전교활동에 전념했다.

의금부에서 공초를 받기 1년 전에는 조선의 천주교 최고지도자 자격으로 북경 천주당 주교에게 두 차례나 밀사를 파견했었다. 첫 번째는 1789년 10월이었고 두 번째는 그 다음 해 7월이었다. 첫 번째 밀사 파견 목적은 북경 주교에게 조선의 가성직 제도의 가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북경 남당 구베아 주교의 답변은 불가였다. 가성직 제도를 주도한 ‘가(假)신부’들의 일등통회(一等痛悔: 최고 수준의 통절한 회개)도 요구받았다. 이승훈은 이에 순종하고 회개하였다. 가성직 제도가 불가하다면 외국인 신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

아울러 신자로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가당한 일인지도 묻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북경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윤유일을 다시 북경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그해 7월 건륭제 팔순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이 파견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의 목회서신을 가져온 지 겨우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이승훈은 윤유일을 사절단의 마부로 위장시켜 북경으로 서둘러 보냈다. 윤유일이 서울로 돌아온 때는 10월 말로 이승훈이 의금부 도사로 있을 때였다. 밀사 파견은 은밀하고 위대하게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때 윤유일이 가져온 구베아 주교의 목회 서신이 문제였다. 구베아 주교는 조상 제사를 효 문화의 일환으로 인정한 예수회 출신의 마테오 리치 신부와 달리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로 간주한 프란체스코 교단 출신의 신부였다. 그는 조상 제사를 단호하게 금지하는 목회 서신을 윤유일에게 건네준 것이다.

 

윤우일 초상. 1789년 이승훈의 밀사로 북경 남당에 갔을 때 궁정화가로 활동한 빠지 수사가 그렸다.
윤우일 초상. 1789년 이승훈의 밀사로 북경 남당에 갔을 때 궁정화가로 활동한 빠지 수사가 그렸다.

 

한편 이승훈은 윤유일을 북경으로 파견해놓고 그가 돌아오기 전에 채제공의 추천으로 의금부 도사가 되어 있었다. 7년 전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약속한 전교(傳敎)만의 삶을 포기한 것이다. 그가 가성직 제도 문제로 교계에서 지도력을 상실하여 의기소침하고 있었을 때, 함께 신앙공동체를 꾸려가던 처남인 정약용이 1789년 대과 합격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조정에서 활약하는 모습에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이승훈은 의금부 도사일 때 조상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목회서신을 받았다. 커다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1785년 을사 추조 사건 이후 천주교는 국가적으로 금지된 사학(邪學)이었지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았던 그간에는 누구나 ‘은밀하게 위대하게’ 신앙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신주단지를 깨지 않으면 안 될 판이다.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면 이웃이나 관에서 모를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제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관직을 포기하거나 죽음을 각오하는 위대한(?) 신앙을 강요받는 것을 의미했다.

천주교 신앙을 자발적으로 수용했던 많은 신자들, 특히 양반 신자들은 당황했다. 이승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공개적으로 거부한 사건이 터져나왔다. 이승훈이 평택현감으로 있을 때 일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참수 판결이 내려졌다. 홍낙안과 이기경 등 공서파들이 이승훈을 천주교 전파의 원흉으로 지목하면서 이승훈은 자칫 죽음으로 몰릴 처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승훈은 신앙이 조금씩 흔들리는 조짐은 있어도 천주교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관직을 유지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친구의 사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판토하의 칠극(七克)으로 다져진 신앙의 힘은 작동하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 새빨간 거짓말로 자기 변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작은 성공이 큰 실패를 불렀을까? 1801년 정조 승하 후 노론 벽파들이 남인을 숙청하고 천주교인을 대대적으로 탄압할 때에도 이승훈은 배교 코스프레 전략으로 일관하다 스스로 함정에 빠져 끝내 살아나오지 못했다.

 

- 정약용의 생존전략

이는 함께 의금부로 끌려왔지만 살아서 나간 정약용의 생존 전략과는 대조적이었다. 정약용은 진산 사건 이전까지는 천주교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일찍이 시인하는 한편 그 이후로는 천주교를 떠났다는 사실을 밝혔다. 여러 정황도 그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신유년의 천주교 박해를 사화(士禍)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배교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말해 정약종의 서한에서 동생 정약용이 이미 천주교를 떠났다는 증거가 나온 것만으로는 의금부에서 살아서 걸어 나갈 수 없는 일이다.

 

의금부 금오계첩
의금부 전경: 의금부 중심 건물 전면에 돌출한 호두각(虎頭閣)이 죄인들이 심문받던 곳이다.(자료출처;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제가 재작년(1799년, 정조 23년) 형조에서 근무할 때에 척사방략을 지어 임금께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사람들의 비방을 받아 직책에서 교체되었기 때문에 바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사악한 천주학을 하는 사람은 제게는 원수입니다. 지금 만약 제게 10일의 기한을 주시고 영리한 포교(捕校)를 데리고 나가게 해주신다면 이른바 사악한 천주학의 소굴을 마땅히 체포하여 바치겠습니다.“

”제 형인 정약종은 작년 여름 대간이 임금님께 보고한 후 양근에서 도망쳐 배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서울에서 이르러 전동의 청석동 오른편 서너 번째 집에 머문다고 들었습니다.”

“최창현은 괴수의 우두머리이며 황사영은 죽어도 변치 않을 것이니 비록 조카사위이지만 바로 원수입니다.”

“이백다(李伯多)는 곧 이승훈이며 권사물(權沙勿)은 권일신입니다. 백다와 사물은 곧 서양의 호입니다. 그때 저 또한 이 책을 보았기 때문에 대충 이러한 호들을 압니다.”

“이승훈이 진술하기를 을사년 이후에는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네가 진술한 것을 보니 이승훈이 서양식 호를 부르며 너와 함께 교류했던 것은 곧 을사년 이후이다. 이승훈이 속인 것이 아니겠느냐?”

“한마디로 면목이 없습니다”

“소굴의 우두머리는 진실로 어떤 놈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들은 대로 말하자면 김백순이란 이름이 파다하게 입에 오르내리고 포천의 홍교만 또한 유명합니다만 제 형과는 사돈간이자 홍주만의 동생입니다.

천주학의 소굴을 샅샅이 찾아내는 데는 또한 방법이 있습니다. 최창현이나 황사영 같은 무리들은 비록 날마다 여러 차례 매질을 할지라도 결코 실토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종들이나 학생들 중에서 사악한 천주학에 깊이 물들지 않은 사람을 체포해 심문한 연후에야 그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 기록된 정약용 진술의 일부이다.

그는 국문장에서 매형인 이승훈은 집안을 망친 원수이고 조카 사위인 황사영은 신앙을 버리지 않을 나라의 원수로 진술했다. 그는 천주교도들을 소탕하는 데에 적극 협력하는 자세를 취했다. 천주교도들의 세례명과 직책을 밝히기도 하고 숨어있는 양반 신자들을 잡아들이는 묘책까지도 설명해주었다.

 

- 최초의 영세자, 배교자로 죽다

 

서대문 역사공원 순교기념비. 이곳이 신유박해 때 처형장소로 사용된 서소문 밖 형장이다. (사진 황효진)
서소문 역사공원 순교기념비. 이곳이 신유박해 때 처형장소로 사용된 서소문 밖 형장이다. (사진 황효진)

 

이승훈은 정약용과 달리 이번에도 소극적인 배교 코스프레만 되풀이했다.

진산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을사추조 사건 이후 줄곧 천주교를 떠나왔다고 우겨댔다. 1795년 예산 유배 때에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또 하나의 배교문인 유혹문(牖惑文)을 짓기도 했다고 자랑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서학책 구입 경위를 말하면서 아버지 핑계를 댔다가 불효자식으로 취급받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정약용의 진술로 을사추조 사건 이후 베드로(伯多)라는 이름으로 신부 활동을 한 사실도 드러났다. 정약종으로부터는 그가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진술도 나왔다.

베드로 이승훈의 부인 전략은 무참히 무너졌다. 진산사건 이후에는 실제로 천주교를 떠났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진술은 더 이상 신뢰받지 못했다. 숨어있는 신자들을 밝히라고 추궁당했지만 그는 천주교 신자들로부터도 배척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숨어있는 신자들을 알지도 못했다. 다만 의금부 국문장에서 서로 원수가 된 정약용의 신앙 활동만 의미없게 폭로했을 뿐이다. 그는 결국 구서전법(購書傳法), 자위교주(自爲敎主), 밀통양인(密通洋人), 잠모가환(潛謀家煥: 이가환과 몰래 모의한 일) 등 네 가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정약종 등 다른 순교자와 함께 처형당했다.

이승훈이 배교 코스프레만 되풀이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여정을 진솔하게 밝히면서 배교자임을 입증하고 천주교인들을 소탕하는 데 협조하였다면 정약용처럼 살아날 수 있었을까? 권력은 천주교를 최초로 전한 원흉(?)을 처단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훈은 순교자로 죽지 않았다. 그는 서소문 밖 형장에서 배교자로 참수되었다. 1874년 프랑스에서 출판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달레 신부는 이승훈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했다.

 

“천주교도이건 아니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배교로도 그의 목숨은 구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간단한 행위로도 그 피할 수 없는 형벌을 승리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듭되고 고집스런 비겁이 하나님의 인내심을 지치게 한 모양이던지 그는 자기의 배교를 철회하지 않고 통회한다는 조그마한 표시도 하지 않고 숨을 거두었다. 맨 먼저 맹세한 그가, 자기 동포들에게 성세(聖洗)와 복음을 가져왔던 그가 순교자들과 함께 죽음을 향하여 나가갔으되, 순교자는 아니었다. 그는 천주교인이라고 참수당하였으나 배교자로 죽었다.”

 

인천 남동구에 있는 이승훈의 진묘. 1980년 광주 천진암 천주교 성지로 이장되었다.
인천 남동구에 있는 이승훈의 진묘. 1980년 광주 천진암 천주교 성지로 이장되었다. (사진 황효진)
이승훈의 삼남 이신규의 묘. 1868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이승훈의 삼남 이신규의 묘. 1868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사진 황효진)

 

하늘과 땅 경계 져서 서쪽 동쪽 구분하니(天經地紀限西東)

무덤 골짝 무지개 다리 안개 속에 어둑하다.(墓壑虹橋靄中)

한 심지 심향(心香)을 책과 함께 불태우고(一炷心香書共火)

멀리 조묘(潮廟:한유의 사당) 바라보며 문공(한유의 시호)께 제사하리.(遙瞻潮廟祭文公)

 

이승훈의 벽이시다. 이승훈이 배교 코스프레를 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로 활용한 무기이기도 하다. 

그의 영혼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시에서 읊은 대로 불교를 배척한 한유의 사당에 향을 피우고 있을까?

그의 첫 믿음 대로 하나님을 향해 경배와 찬양을 하고 있을까?

제물진두 순교성지. 1871년 신미양요 때 이연구 이균구 형제 등 이승훈 후손들이 순교한 곳이다. (사진 황효진)
필자 황효진
필자 황효진

 

관련기사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진한 2021-10-08 12:15:02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



@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윤진한 2021-10-08 12:14:29
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http://blog.daum.net/macmaca/3131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입니다. 유교는 국교로

윤진한 2021-10-08 12:13:37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

윤진한 2021-10-08 12:12:43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