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과 번개는 신의 축복
상태바
천둥과 번개는 신의 축복
  • 최원영
  • 승인 2021.11.01 08: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원영의 책갈피] 제24화

 

https://youtu.be/xGB1oZMHs8Y

 

 

지난 시간에는 삶의 특성 중에서 ‘운동성’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들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는 삶의 ‘양극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에서 둘이 나왔습니다. 삶도 같습니다.

삶은 시계추처럼 좌우를 오간다고 했습니다. 시계추의 좌우 끝에는 상반된 것들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성공이 있으면 실패도 있습니다. 이 사이를 오가는 것이 삶입니다. 저는 이런 속성을 ‘삶의 양극성’이라고 부릅니다.

인터넷에서 〈절반의 성공〉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대부분 쪼개진 삶을 산다. 쪼개진 삶이란 ‘먹고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는 삶과 ‘내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삶, 이렇게 이쪽과 저쪽이란 양분된 삶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산다.”

이것이 삶의 얼굴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자는 이렇게 도움말을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쪼개진 삶을 내가 스스로 선택한 생활이 아니므로 자칫 패배의식에 잡혀 수동적인 삶, 무력한 삶, 방향성 없는 삶을 살 수도 있다. 따라서 끌려가는 삶이 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얽매여 사는 삶을 거부할 수도 없고, 자유롭게 노닐고 싶은 욕망을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극과 극의 삶의 행태를 조화롭게 배분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는 외부에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깨달아야만 취할 수 있습니다. 깨닫기 위해서 책을 열고 귀를 열어야 합니다. 바로 지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지혜는 시계추의 양극을 모두 볼 수 있는 혜안을 줍니다. 그러나 지식은 시계추의 한쪽 끝에 머물고 있어서 다른 쪽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식에 머무느냐, 아니면 지식을 통해 지혜를 갖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긍정력 사전》(최규상)에 이런 예가 나옵니다.

“딸이 천둥과 번개를 무서워하더니 이젠 좋아한다.

‘천둥과 번개는 신이 사람을 위해 쏘아주는 폭죽이라고 말해주었거든.’

태양은 양지와 음지를 동시에 만들어준다. 하지만 태양을 볼 거냐, 그림자를 볼 거냐의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천둥 번개를 두려움으로 볼 거냐, 축제의 시작으로 볼 거냐, 하는 것도 같다.”

지식은 자신이 아는 것만 ‘옳다’고 믿지만,

지혜는 자신이 모르는 것도 ‘있다’라고 믿습니다.

지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지만,

지혜는 보이지 않는 것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바보 되어 주기》(안순혜)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물은 아래로만 흐른다고 생각한다. 위로 올라가는 물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흐르는 물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물은 아래로 흐르는 만큼 항상 위로도 올라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는 물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 눈과 비를 만들어 우리에게 풍요함을 주는 그 물 말이다.”

시계추의 한쪽 끝에는 계율을 따르는 사람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마음을 가꾸어 주는 작은 이야기》(이도환)에 이들이 사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는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계율을 빈틈없이 따르는 수도승이다. 술도 못 마시고, 오전 11시 이후엔 어떤 음식도 안 먹는다.

또 한 사람은 철학과 교수다. 계율엔 무관심하고 일체의 고정관념도 거부한 자유주의자다. 수도승과 달리 먹고 싶을 때 먹고, 잠이 오면 낮이고 밤이고 잔다.”

어느 날, 수도승이 교수를 방문했다. 교수는 마침 술을 마시고 있다.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같이 한잔하시지요?’

‘난 술을 마시지 않소.’

‘스님, 어찌 술맛을 모르는 사람을 인간이라고 하겠소?’

이에 화가 난 수도승이 벌컥 소리를 지른다.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그런 논리가 어디 있소? 내가 인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여러분은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삶의 태도를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과는 다른 기준으로 사는 사람과도 기꺼이 벗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사람과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친구가 되어 즐거움을 함께 나눌 줄 압니다. 독자 여러분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