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선수 칼 루이스와 에디슨의 성공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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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선수 칼 루이스와 에디슨의 성공 원인
  • 최원영
  • 승인 2021.11.29 2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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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28화

 

지난 몇 차례의 방송에서 우리는 삶의 양극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삶은 기쁨과 슬픔이라는 양극 사이를 오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쁜 일을 마주했을 때는 그 기분을 즐기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통스러운 일을 마주했을 때입니다. 그 고통이 때로는 우리를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으로 빠뜨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점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의 소금 창고》(김태광)에 미국 육상선수 칼 루이스의 일화가 나옵니다.

“그가 살던 도시는 늘 교통지옥이었다. 그래서 차량 대신 언제나 오토바이를 이용했다. 어느 날, 누군가 오토바이를 훔쳐갔다. 그래서 자전거를 샀다. 이것 역시 훔쳐갔다. 화난 그는 다시는 오토바이를 안 사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12km나 떨어진 거리를 매일 뛰어다녔다. 훗날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인터뷰에서 말했다. ‘어느 도둑도 나의 달리기만은 훔쳐갈 수 없었다.’”

발명왕 에디슨의 경우도 같습니다.

“소년인 에디슨이 기차 안에서 물건을 팔았는데 실수해 상관에게 따귀를 맞고 기차에서 쫓겨났다. 그때 청력이 손상되어 겨우 말을 알아들을 수만 있었다. 어느 날 구식보청기에 의지한 에디슨에게 물었다.

‘잘 듣지 못해 연구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나?’

‘전혀요. 오히려 도움이 됐어요. 쓸데없는 수다를 듣지 않아도 되니까. 게다가 마음속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었어요.’”

만약 칼 루이스가 도둑질한 사람을 원망하면서 분노만을 표했다면 그의 미래는 어떻게 됐을까요? 만약 에디슨이 따귀를 때린 상관을 원망하며 발명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은 순전히 ‘나’의 몫입니다. 위기와 기회는 시계추의 좌우에 나란히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기쁨’과 ‘슬픔’이라는 양극으로 구성됩니다. 자녀가 태어났을 때는 한없이 기쁘지만 자녀가 자라 말썽이라도 피울 때면 한없이 슬픕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최운규)에서 저자는 말합니다.

“즐거움은 슬픔이나 고통이 있기에 가능하다. 원하는 감정을 만들어주는 기계가 있다고 하자. 사람은 기쁨이나 행복을 주로 원할 것이다. 그런데 기계속에 들어가 원하는 감정 버튼을 눌러 원하는 시간만큼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할 때, 사람들은 과연 그 안에 들어가고 싶을까? 거의 없다고 한다.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것은 기쁨을 얻을 때까지의 힘든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몇 시간을 걷느라 온몸이 땀에 젖고 숨이 가쁜 고통이 있어야 에어컨이 있는 시원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만약 시원한 사무실에서 온종일 있다면 그 고마움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고통은 기쁨의 전주곡이라는 이치를 우리 모두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행복의 공식》(슈테판 클라인)에 따르면, 행복과 불행은 기막힌 공존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불행이 엄습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리라고 여기고, 행복과 불행이 배타적이라고 여기지만

이런 생각은 오류라고 합니다. 즉 행복은 불행의 반대가 아니라 서로 공존한다는 겁니다.

저자는 교통체증을 예로 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교통체증으로 인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 분노는 몸속에서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킨다. 그 결과가 초조함, 이유 없는 흥분이다. 이런 상태로 목적지에 도착하면 몸은 기진맥진한 피로감에 쌓여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교통체증 시간을 피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이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정시에 출근해야 하니까요.

교통체증으로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을 때 이렇게 해보라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첫째, 차 안에 있는 동안 오디오북을 듣거나 외국어 테이프를 듣는 시간을 가져보라. 그러면 주위 환경에 그대가 무기력하게 내맡겨져 있다는 느낌을 줄일 수 있을 거다.

둘째, 즐거운 상상을 해보라. 연애 시절 흐뭇한 추억을 떠올리거나,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거다.”

저자에 따르면, 즐거운 기대나 상상은 분노에 직접 대항해서 분노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는 ‘하나’에서 ‘남자’와 ‘여자’로 나뉘고, 자연이라는 ‘하나’에서 ‘동물’과 ‘식물’로 나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속성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그 둘은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양극성’입니다.

삶도 같습니다. 서로 다른 ‘나’와 ‘너’가 서로 다른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늘 다툼과 갈등이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면 사랑과 존중이 이어집니다. 시청자 여러분의 삶이 후자에 속하기를 소망합니다.

몇 차례 방송을 통해서 삶이 행복과 불행, 또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양극 사이를 오가는 과정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과 기쁨을 마주하고 있을 때보다는 오히려 불행과 슬픔이라는 고통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성장할 수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칼 루이스와 에디슨의 경우처럼 고통과 슬픔을 잘 극복해내는 순간 그것이 성장과 성숙의 발판이 된다는 점이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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