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강화 의병 30명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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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강화 의병 30명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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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2.0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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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과 수뢰정으로 강화 앞바다에서 폭도토벌에 나섰다’는 일본 기밀보고서(『폭도에 관한 편책』. 인경비 제350호)
‘군함과 수뢰정으로 강화 앞바다에서 폭도토벌에 나섰다’는 일본 기밀보고서(『폭도에 관한 편책』. 인경비 제350호)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가 강화 의병 30명을 발굴하고 소책자를 발간했다. 강화 출신 25명과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에서 일본 군경과 의병투쟁을 벌였던 타지 출신 5명을 포함한 30명이다.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지난해 10월 13일부터 강화 의병 발굴에 나서 4일 오후 그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에서 의병 공적으로 포상을 시작한 1962년 이래 지금까지 강화 출신은 8명에 불과했는데, 그 3배가 넘는 의병 유공자를 발굴한 것이다.

이번에 발굴된 의병은 김용기(金龍基)・이능권(李能權)・지홍윤(池弘允) 의병장이 이끌었던 의진(義陣:의병부대) 소속의 의병장과 의병이 대부분이다. 강화 의병은 뭍에서는 이능권 의진, 바다에서는 김용기·지홍윤 의진이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능권 의병장은 강화 출신으로 광무황제의 밀명에따라 헤이그 특사 이준 일행을 호위하여 남대문역에서 열차를 이용, 부산을 거쳐 러시아로 향하는 여객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지만, 결국 이준 특사가 자결하고,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했다는 소식에 의병을 일으켜서 강화도를 의병의 천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김용기 의병장은 황해도 배천 출신으로 시위대 기병 부교(副校)로 근무 중, 군대가 해산되자 광무황제의 밀지(密旨)를 받고 거의한 박정빈(朴正彬) 의진에서 창의돌격대 총대장이 되어 경기도와 황해도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8년 4월부터 10월까지 강화・교동과 인근 도서지방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지홍윤 의병장은 강화 출신으로 강화진위대에 부교(副校)로 근무한 적이 있었고, 제주도에서 전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일제에 의해 1905년부터 강화진위대가 강화분견대로 축소된데다가 1907년 8월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상황에 이르자 의병을 일으켰다. 강화 17면, 신도・시도・장봉도・주문도・아비도・망도・말도 등 도서지방과 황해도 평산・배천・연안군에 이르기까지 김용기 의병장과 맹위를 떨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Ⅱ권 「한국광복군소사」(1943)에는 66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공적이 담겼는데, 지홍윤은 군대해산에 반발, 자결한 박승환(朴昇煥)에 이어 19번째로 소개될 만큼 훌륭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일제는 강화 의병 진압을 위해 러일전쟁 때 통보함(通報艦)으로 활약했던 군함 치하야[千早]와 사기[鷺]・우즈라[鶉]・하시다카[鷂] 등 쾌속 수뢰정(水雷艇)을 동원하여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을 왕래하는 의병들의 나룻배나 어선을 공격했고, 뭍에는 육전대(陸戰隊:우리 해병대와 유사함)까지 파견하여 약 6개월 동안 의병 진압에 나섰다. 김용기·지홍윤 의진은 7척의 선단을 형성하여 강화도를 비롯한 도서지방을 오가며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는 한말 의병사에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강화의병 발굴 관련 사진자료 (치하야함 사진)
강화의병 진입에 나섰던 일제 치하야함 
일제 하시다카함
 하시다카함

 

이들 의병장 의진에서 활약했지만 아직 포상되지 못한 대표적인 분은 김용기 의진의 금찰장(禁察長) 고재환(高在煥)・소모장(召謀長) 김장석(金長石), 이능권 의진의 참모 김추옥(金秋玉)・여만복(呂萬卜)・유성준(兪成俊)・이호춘(李浩春), 지홍윤 의진의 고부성(高夫成)・김신명(金愼明)・장동섭(張東燮) 등이고, 강화도에서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고 의병투쟁을 벌인 의병장 김태의(金泰宜)・오윤영(吳允榮)・장인선(張仁善) 등이다.

그리고 발굴과정에서 강화군 하도면 주윤창(朱潤昌), 내가면 배영도(裵永道) 집에 의병이 금품을 강탈해 갔다고 인천경찰서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문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주로 이능권 의진이 총기 구입을 위해 강화군 재력가들에게 금품을 요청하고, 재력가는 금품을 마련해 두었다가 이를 제공한 것인데, 일본 군경에 이 사실이 발각되면 이른바 “폭도 협력자”라 하여 엄청난 고초와 처벌이 따랐기 때문에 의병들이 요청한 금품을 가지고 갈 때는 재력가를 새끼줄로 묶고, 폭행을 가해 마치 강탈해 가는 형국을 만든 것이었다.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경인지역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 화보, 강화의병 현황, 강화의병 공적 포상자 공훈록,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 강화의병에 대한 『통감부기록』과 『한국독립운동사』를 정리한 칼라 4·6배판 126쪽 분량이다.

인천대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사연구소를 설립하여 3년 동안 6차례 2828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하여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한 바 있고, 곧 7차 422명을 포함, 총 3250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신청을 하게 된다.

강화의병 발굴보고서 (기 송부)
강화의병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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