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과 박완서의 나목 - 덕수궁 전시회 '裸木'을 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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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과 박완서의 나목 - 덕수궁 전시회 '裸木'을 접하고
  • 허회숙 시민기자
  • 승인 2022.02.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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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기획]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 3월1일까지 전시
밀레가 되고 싶었던 소년 박수근과 ‘나목’의 박완서
두 거장의 인연이 빚어 낸 전시회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해 11월부터 오는 3월 1일 까지 박수근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필자는 몇 년 전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 기념관에서 그의 소박하고 진솔한 영혼을 만나고 깊은 감동을 느꼈었다.

이번 전시 제목 ‘나목’은 박수근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참혹했던 시대에 곤궁한 생활을 이어나간 서민들과 함께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고 찬란한 예술을 꽃피운 그 박수근.

박수근이 박완서를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겨울, 미군 PX에서였다.

박수근(1914~ 1965)은 양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난 박수근은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셨기에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 살림까지 도맡아야 했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다. 초등학교 담임인 오득영 선생님의 격려를 받으며 독학으로 개성적인 화법을 구축하였다.

12세 때 화집에서 밀레의 ‘만종’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기를 꿈꾸어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함으로써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그림만 그리며 사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미군 PX에서 초상화가로 일했고, 용산 미군 부대에서 전시를 열고 그림을 팔았다.

박완서는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 달도 안돼 전쟁이 일어나자 하루 아침에 ‘소녀 가장’이 되어 미군 PX기념품 가게에서 점원이 되었다.

 

이 때 만난 인연이후 1952년 박완서가 미군 PX일을 그만두고 주부로 생활하면서 한동안 박완서는 박수근을 잊고 살았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던 시절, 박수근은 어찌 보면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결국 화가로, 생활인으로 살아내면서, ‘보석같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

1965년 박수근 유작전에서 그의 작품을 맞닥뜨린 박완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이 박완서로 하여금 ‘나목’을 쓰게 했고, 1970년 여성동아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처음 소설가로 등단하게 되었다.

유작전 이후 45년이 지난 2010년, 갤러리 현대에서 박수근의 45주기전이 열렸다.

박완서는 이 전시에서 다시한번 박수근의 작품을 보고 ‘보석처럼 빛나던 나무와 여인’이란 수필을 썼다. 이듬 해 박완서는 80세의 생을 마감했다.

결국 박완서의 45년 작가 생활의 시작과 끝은 ‘박수근’이었던 셈이다.

누군가에게 밀레와 같은 감동을 주기를 소망했던 화가 박수근은 박완서를 통해 결국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지난 해 11월 11일 전시회가 열리자 미술관 개관 시간인 10시가 되기도 전에 코로나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추위 속에 야외에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미리 예약을 하면 기다림 없이 입장이 가능하다고 하여 예약을 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2월 4일(금) 오전에 무작정 전시회장을 찾았다.

화, 목, 금, 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이며 수, 토는 오전 10부터 오후9시(입장 마감 오후 8시)이다.

월요일은 휴관이다.(02-2022-0600,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강추위 예보에 겨울 바람까지 세차게 부는 날씨였음에도 덕수궁 입구에서부터 혼자 또는 둘이서 빠른 걸음으로 전시회장을 향하는 사람들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전시는 네 개의 전시실로 나뉘어 박수근이 19세에 그린 수채화부터 51세로 타계하기 직전에 제작한 유화까지 그의 전 생애의 작품과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박수근이 살았던 1950년대와 1960년대 전 후의 한국 사회, 서울 풍경, 사람들의 일상을 그려볼 수가 있다. 전체 출품작은 174점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한 순간에 깃든 진실과 고귀함을 이끌어 낸 그의 그림들은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딘 보통 사람에 대한 헌사였다.

그의 작업과정도 인고의 노력이 따르는 것이었다.

박수근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이웃들은 의연하고 당당하다.

그는 참혹한 전쟁이 지나가고 폐허가 된 서울에서 강인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이웃을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존경과 사랑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

박수근은 물감을 여러 겹 쌓아 올려서 거칠거칠한 질감을 만들어 내고 형태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고, 색을 아껴가면서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나라의 옛 흙벽돌, 분청사기, 창호지, 그리고 화강석으로 만든 불상 등을 떠올리게 된다.

비평가들은 박수근을 ‘서양의 유화를 한국적으로 잘 해석한 화가’라고 평한다.

그의 그림은 처음 미군들에 의해 팔리다가 차츰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품이 되었다.

1965년 박수근이 타계하고 1970년대 말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한 후에야 박수근의 그림은 비로소 국내에서도 인기리에 거래되고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전시회였다.

밖으로 나와 덕수궁 석조전 뜰에서 바라본 하늘은 고려청자와도 같이 푸르고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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