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원짜리 돈을 보지 말고 그려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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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원짜리 돈을 보지 말고 그려보아라.”
  • 최원영
  • 승인 2022.02.0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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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38화

 

 

지난 5월부터 지난주까지 우리는 이 방송을 통해서, 시계추의 세 가지 속성으로 삶을 반추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시계추가 갖고 있는 ‘운동성’, ‘양극성’, ‘지향성’이라는 속성이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도 목이 마르다》(최운규)에 초등학교의 미술 시간에 있었던 얘기가 나옵니다.

“선생님이 말했다. ‘만 원짜리 돈을 보지 말고 그려보아라.’

가난한 집 아이는 부잣집 아이보다 크기를 더 크게 그렸다. 같은 만원이지만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더 크게 느껴져서다.”

여러분, 이 예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어느 것이 더 큰지, 어느 것이 더 작은지를 따지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두고 다투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툴 일일까요? 더 크면 어떻고, 더 작으면 어떻겠습니까?

만원에 부여된 가치는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사람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가치가 다른데 어떻게 그것을 ‘맞고’ ‘틀리고’라고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오늘 전해드릴 지혜는 중도적인 삶입니다.

중도적 삶이란 다른 한쪽을 헤아릴 줄 아는 여유를 말합니다. 이를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계율을 깨뜨릴 수도 있고, 때로는 계율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회색 인간’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중도의 길을 가야 합니다. 평화로운 마음과 함께요.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쪽에 머무는 그 사람을 귀한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다른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귀하게 여겨도 이별의 아픔은 늘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어김없이 그 이별의 아픔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볼까요?

이별의 슬픔에 빠진 남자가 여러분을 찾아와 조언을 구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로 그를 위로하시겠어요?

 

《좋은 생각》(2019년 6월호)에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이별의 슬픔에 빠진 남자가 현자를 찾아가 물었다.

‘아무리 아끼고 사랑해도 결국 언젠가는 헤어집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반드시 변하고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현자는 작은 상자를 그에게 내어놓았다.

‘이 안엔 시계가 있소. 아버지의 유품이오. 그러나 멈추어 버리고 말았소.’

남자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시곗바늘은 여전히 움직이며 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는 아직 멀쩡한데요?’

현자가 말했다.

‘이 시계는 제게 무척 소중합니다. 튼튼하고, 무늬가 아름답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지요. 그러나 제게 이 시계는 이미 멈춘 것과 같소. 언젠가는 이 시계도 멈출 때가 올 테니까요. 그것이 삶의 이치입니다. 무엇이든 그 안에 상실이 있습니다. 이 시계가 이미 멈춘 것과 다름없음을 알 때,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귀하게 여길 겁니다.’”

이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삶의 한쪽 끝에 ‘만남’이 있으면, 다른 한쪽 끝에는 ‘이별’이 있다는 것을요. 그러나 이별이 슬프다고 만남 자체를 갖지 않으면 건강한 삶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슬픔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조금 흐르면 ‘만남’이 다시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운동성, 즉 우리의 삶도 늘 변화하고 있고,

양극성, 즉 삶에는 좋고 나쁨, 또는 기쁨과 슬픔 등 상반된 두 개의 삶이 존재하며,

지향성, 즉 양극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한쪽에 머물러 있을 때면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삶이 운동성과 양극성, 그리고 지향성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한쪽에 머물 때는 다른 한쪽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갈등과 분노, 실망을 일으켜왔습니다. 그래서 좌우 모두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계추에서 양쪽 모두를 볼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딱 한 군데서 좌우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시계추의 정중앙입니다.

이곳이 ‘중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은 한쪽 끝에 있더라도 우리의 의식만큼은 ‘중도’에 서서 다른 한쪽까지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담사를 다녀온 지인이 그곳에서 읽었다는 어느 시인의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개구리는 연못이 운동장이고, 올빼미는 밤이 낮이고, 지렁이는 땅속이 갑갑하지 않습니다.

상대 입장에서 헤아릴 때 닫혔던 문도 열리고, 함께 사는 길도 열립니다.”라고요.

시인의 가르침처럼, 역지사지하며 배려하는 삶이 바로 중도적인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삶의 속성인 운동성, 양극성, 지향성을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중도적인 삶이었지요. 중도적인 삶이란 서로 다른 것을 일치시키는 삶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존중해주는 삶, 헤아려주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이 행복을 부르는 마법의 삶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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