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인천, 그 도시 풍경... 숭의로타리, 표관, 해안동 언덕
상태바
1943년 인천, 그 도시 풍경... 숭의로타리, 표관, 해안동 언덕
  • 배성수
  • 승인 2022.04.12 09: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13)
전시장에서 못 다한 이야기② - 인천시립박물관 갤러리전시 《화교들의 항일운동》전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매체 특성 상 박물관 전시는 유물과 사진, 그리고 최소한의 텍스트로 구성된다. 텍스트는 짧을수록 좋은 법이다. 자세한 설명으로 최대한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는 기획자의 의도와 달리 과다한 정보는 도리어 전시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시립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화교들의 항일운동> 전시도 텍스트가 많지 않다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다. 지난번에 이어 전시장에서 다 하지 못한 1943년 도시 인천의 풍경을 이야기 한다.

 

이야기 넷. 숭의동 로터리

로터리(Rotary). 원활한 교통 흐름을 위해 세 개 이상의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에 설치한 원형지대를 말하며 우리말로 회전교차로라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차량이 도입되고 도로교통이 발달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에 도입되었으며, 인천의 경우 1930년대 후반 시가지계획에 따라 도로망을 확충하면서 만들어졌다. 1937년에 공포된 인천시가지계획에 따르면 송림동 로터리를 비롯하여 모두 열 개의 로터리를 설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자재와 인력 부족에 시달리며 광복 때까지 만들어진 로터리는 송림동, 박문, 해안동, 숭의동, 용현동 로터리 등 다섯 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박문 로터리와 해안동 로터리는 시가지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도로를 신설하면서 로터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숭의동 로터리
1943년 숭의동 로터리

다른 네 개의 로터리가 중앙 원형지대 둘레로 도로를 놓았던 것과는 달리 숭의동 로터리는 그 내부에도 도로를 두었다. 3~5개의 도로가 교차하는 다른 곳에 비해 숭의동의 경우 크고 작은 도로 여덟 개가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도로가 모이는 교차점이다 보니 회전 방식만으로는 원활한 차량 흐름을 유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도 이곳은 회전 교차로와 직선 교차로 방식을 혼용하고 있으며, 신호에 따라 교통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차량의 흐름을 조절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로터리 아닌 로터리가 된 것이다.

당시 만들었던 다섯 개의 로터리 중 이제 남아있는 것은 숭의동 로터리가 유일하다. 도심의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 모두 신호등으로 차량을 통제하는 직선 교차로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차량 통행이 적은 해안동의 경우 지난 2018년 로터리를 부활시켰다. 최근 숭의동 주변으로 도시 개발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교통량이 급증하게 되면 숭의동 로터리의 운명도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다.

1946년 미군 지도에 표시된 숭의동 로터리(중앙)와 용현동 로터리(우하단)
1946년 미군 지도에 표시된 숭의동 로터리(중앙)와 용현동 로터리(우하단)

 

이야기 다섯. 표관(瓢館)

1914년 10월 31일 인천부청 인근에서 인천여관을 운영하던 시미즈 슈조[淸水周藏]가 지금 신포동 하나은행 자리에 1만5천원의 자본을 투입하여 상설영화관을 설립했다. 인천 최초의 상설영화관 표관의 시작이다. 2층 건물에 정원은 900명이었으나 최대 12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주로 일본인을 위한 영화를 상영했다. 1921년 극장 소유주가 조선의 대표적 영화배급사인 닛타 연예부의 닛타 코이치[新田耕市]로 변경되어 있어 1920년 이전에 극장 운영권이 창업주 시미즈 슈조에서 닛타 연예부로 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닛타 연예부는 1912년부터 서울 충무로에서 대정관(大正館)이라는 영화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인천 표관의 실질적인 운영은 닛타 코이치의 동생 닛타 마타헤이[新田又平]가 맡아보고 있었다.

개관 이듬해 영사실에서 불이나 극장 일부를 태우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다양한 영업 전략을 통해 관객을 유치하여 1935년에는 연간 입장객이 15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조선인 관객 유치를 위해 조선인 변사를 초청하여 우리말로 설명하게 하거나, 모리나가[森永] 제과회사와 제휴하여 1924년에는 5월 5일을 ‘모리나가 데이’로 정하고 캬라멜을 소지한 관객에 한해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게 했다.

1943년 7월 표관
1943년 7월 표관

일제강점기 표관은 세 차례의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전면적인 개축이 아니라 앞부분의 모습을 바꾸었던 정도였다. 개관 당시의 건물은 중앙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측 날개를 돌출시킨 형태였고, 2층 상부를 과도한 장식이 들어간 삼각형 형태의 부조로 마감했다. 1936년 대경성사진첩에 수록된 표관의 모습은 현관이 있는 건물 중앙을 앞으로 내어서 좌우 날개와 직선으로 두었으며, 2층 상부 장식도 삼각형에서 원형으로 변화를 주면서 장식적 요소를 제거했다. 일동회 현장검증 사진에 수록된 1943년 7월의 표관은 중앙부분을 다시 앞으로 돌출시켰고, 2층 창호를 상단까지 길쭉한 형태로 배치했으며 그 상부도 직선으로 처리하여 당시 유행하던 모더니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개관 초기의 표관(좌), 1936년 당시의 표관(우)
개관 초기의 표관(좌), 1936년 당시의 표관(우)

일제강점기 애관과 함께 인천을 대표했던 영화관 표관은 광복 후 미군 전용극장으로 이용되다가 1946년 12월부터 인천부세진흥회로 이관되어 ‘문화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을 이어갔다. 6.25전쟁 당시 함포사격으로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1959년경 건물을 새로 짓고 ‘키네마 극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1973년 한국외환은행이 매입하면서 건물을 철거하였고, 은행 건물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야기 여섯. 해안동 언덕

지금 인천역에서 해안동 로터리까지 일명 ‘항미단길’이라 불리는 왕복 4차선의 도로가 뚫려 있다. 원래는 자유공원에서 오림푸스 호텔이 있는 언덕까지 이어지는 응봉산 자락이 있던 곳이다. 인천역에서 해안동으로 가려면 밴댕이 골목 우측의 작은 고갯길을 넘어 한중문화관에 닿거나 철길을 가로질러 오림푸스 호텔과 8부두 사이를 지나 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탑으로 이어지는 우회로를 이용해야 했다. 일설에 따르면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가 풍수지리에 따라 중국인들의 혈을 끊기 위해 이 능선의 가운데로 길을 뚫었다고도 하는데 당시 지도를 놓고 보아도 굳이 이 도로가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천역에서 해안동 로터리까지는 불과 200여m에 불과하고 8부두 앞을 지나는 우회로는 차량이 오가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넓기 때문에 이곳에 도로를 신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05. 도로 개설공사  현장과 차이나타운 초입
1943년 도로 개설공사 현장과 차이나타운 초입

하지만 1937년 인천시가지계획 공포에 따라 확충되기 시작한 인천의 도로망을 살펴보면 도로 신설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만석동, 화수동, 송현동 일대로는 군수 공장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었고, 이곳 공장지대와 인천역, 인천항을 잇는 도로를 개설하여 물류 이동을 원활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인천부에서 새로 놓은 북부 공업철도가 있었지만 대량의 물품이 아닌 이상 상시 이용이 불가능했고, 소량의 자재는 차량으로 운송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도로의 개통시점이 명확치 않아 대략 1940년대 초반 정도로 알려져 왔지만, 일동회 현장검증 사진을 통해 1943년에 개통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미 도로 부지가 확보된 상태였고, 전봇대 등 지장물 이전과 하수관로 매설만 남겨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봇대 우측으로 보이는 작은 길이 원래 해안동으로 향하던 고갯길이었다.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작은 사진 한 장에서 기록에 없는 중요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다.

현재 제물량로와 차이나타운 초입
현재 제물량로와 차이나타운 초입

두 차례에 걸쳐 <화교들의 항일운동> 전시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인천 관련 자료의 수집에 조금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국내・외에는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인천 관련 자료가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그동안 박물관과 시사편찬위원회, 인천문화유산센터 등 각 기관과 개인 연구자의 노력으로 많은 자료가 발굴되었지만, 우연찮게 알게 되거나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발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국외소장 자료를 발굴하여 연구자에게 제공했듯이 흩어져 있는 인천 자료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수집하는 별도의 기관이 필요한 시점이다.

 

→ 지난 기사

화교의 항일운동을 쫓다 - 신흥동 정미소 철길을 찾다 ; 전시장에서 못 다한 이야기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