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명소 - 인천기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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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명소 - 인천기상대
  • 이병기
  • 승인 2010.02.2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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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상업무의 중추적 구실 - 시보의 효시


1905년 응봉산 정상에 이전된 인천관측소 전경

취재: 이병기 기자

1900년대 초반 볕 좋은 어느 날.

"웃터골(현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서 우리측과 일본측이 야구 경기를 벌일 때, 무아지경에 빠진 수많은 구경꾼들은 별안간 '탕!' 하고 터져 나오는 대포 소리에 모두 질색하고 말았다. 또 오포를 구경하던 젊은 친구들도 번연히 대포 소리가 터져 나올 것을 알건만, 으레 귀를 막고 있다가 역시 놀라 껑충 뛰며 박장대소한다." - 仁川昔今(인천석금, 1955년 고일 선생 저) 

중구 송월초등학교 뒷편 전동 25번지에 위치한 인천기상대는 1904년 중구 송학동의 임시관측소였던 것을 1년 후 현재의 응봉산 정상에 '인천관측소'란 명칭으로 이전·신축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인천관측소는 한때 기상예보와 더불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도 겸했다. 1908년경 일본인 '인천거류민단'이 관측소에 시보를 위촉해 응봉현 산허리에 대포를 걸어 실탄 없는 공포탄으로 정오를 알리게 한 것이 '인천시보'인 '오포(午砲)'의 효시다.

낮 12시 정오와 밤 통행금지 시간을 주민들에게 정확히 알려주던 시보는 날마다 쉬지 않고 울려퍼졌다. 당시엔 '싸이렌'이 없어 '오포'라는, 자귀향에 줄을 당겨 인화·폭발시켰던 구식 대포로 시보를 대신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관측소 오포의 이상으로 오포수가 다치는 일이 발생해 1931년 사이렌으로 바뀌게 됐다. 이렇게 시간을 알려주는 오포의 영향으로 응봉산은 주민들에게 오포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인천관측소는 1910년 조선총독부 관측소로 확장된 후 1939년 총독부 기상대로 개칭됐다. 이어 1948년 해방 후 국립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될 때까지 국내·외 기상정보를 수집해 그날그날의 기상을 분석하고 예보했던 국내 기상업무의 중추적 구실을 했던 곳이다.

고일 선생은 인천석금에서 "인천은 '간만의 차'로 유명한게 아니다"며 "대기 측정과 천기예보에서 극동의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점과 일본 '동경중앙기상대'와 영국 런던 '그리니치천문대' 등과 기상 정보를 교환한 것으로 더 알려졌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기상대 전경

당시 날씨예보를 전달하는 유일한 수단은 풍기대에 꽂힌 큰 깃발의 종류와 모양이었다. 깃발의 모양과 색깔로 구분해 풍향은 큰 삼각형 깃발로 4방위를, 날씨는 사각형 깃발로 맑음 또는 비·눈을 표시해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기상관측 뿐만 아니라 기상자료의 교환 및 통신수단도 어려워 예보적중율이 매우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1970년 즈음에 기상레이더와 기상위성자료 수진 장비가 설치되면서 기술적 향상을 이룩했다. 이후 1999년 기상용 슈퍼컴퓨터의 도입으로 예보정확도의 향상을 가져왔다.

현재 인천기상대는 △동네예보 생산 발표(시계열 편집지점: 인천, 강화, 백령면, 부천, 시흥) △해양기상관측용 덕적도 부이, 서수도 등표, 해경 AWS 운영 △기상증명·감정과 자료제공 및 기상상담과 기상홍보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더불어 자유공원 주변에 위치해 가족과 연인, 아이들이 인천의 역사를 되돌아 보는 소중한 문화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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