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에도 남산이 있다, 선행천을 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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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에도 남산이 있다, 선행천을 끼고
  • 장정구
  • 승인 2022.06.09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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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구의 인천 하천이야기]
(50) 선행천 - 동락천과 합류하여 염하로

‘맑은 계곡물은 바위벼랑을 따라 굽이굽이 흐른다. 숲 우거진 오솔길을 몇 리 나아가니, 북으로 거대한 절벽이 솟아 있다. 하늘을 향해 백 보쯤 된다. 올려다보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조선시대 백두대간 설악산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중기 삼연 김창흡 <유봉정기遊鳳頂記>에 나오는 대목이다. 김창흡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양반가문이었던 안동김씨로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다. 김수항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사사(賜死)되자 그 자식들은 은거했다. 특히 김창흡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설악산 등을 유람했다. 기사환국은 희빈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한 일이다.

선행천은 혈구산 동쪽에서 발원한다.
선행천은 혈구산 동쪽에서 발원한다.

강화 선행천의 물줄기는 혈구산 동쪽기슭과 혈구산과 고려산 사이 고비고개에서 시작된다. 지방하천으로 지정관리하는 구간은 충렬사 아래부터이다. 충렬사는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한 선원 김상용 등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왕자들을 모시고 강화로 피신 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손자와 함께 강화산성 남문루에 올라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고 한다. 순절비는 고려궁지 앞 용흥궁 옆에 세웠고 폭사 당시 김상용의 신발이 떨어진 곳에 충렬사를 세웠단다. 실수로 화약에 불이 붙어 폭발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선원 김상용은 조선선비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김상용은 김창흡의 종증조부(증조할아버지의 형제)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싸우자 주장했던 척화파의 대표주자였던 김상헌의 형이다. 김상용과 김상헌 이후 안동김씨는 조선을 대표하는 양반가문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충렬사. 선원 김상용 등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충렬사. 선원 김상용 등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안동김씨는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이후 조선 조정의 중심이 된다. 왕의 외척으로, 세도정치로 순조 · 헌종 · 철종 3대에 걸쳐 조정의 요직을 독점했다. 김조순은 김창흡의 형인 김창집의 4대손이다. 김창집도 영의정을 지냈는데 노론의 대표주자로 신임사화 때 사사되었다. 김창집과 김창흡 등 여섯 형제 모두 뛰어난 문장가였는데 김창흡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자연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백담사 승려를 길잡이 삼아 설악산의 구석구석을 유람했던 기록이 유봉정기다. 지금도 설악산 백담사계곡과 장수대계곡 등 곳곳에 관련 기록들이 안내판으로 남아 있다.
강화에도 남산이 있다. 고려궁지 남쪽으로 솟은 산이다. 남산에 오르면 북산 아래 고려궁지와 강화 읍내가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북산 뒤로는 개성의 송악산이 가깝다. 서쪽으로는 문수산과 염하, 당산과 갑곳진, 전쟁박물관이 바로 코앞이다. 병자호란 때 물밀 듯 쳐들어왔을 청나라 병사들, 당황한 병사들과 대신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허둥지둥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왕자들과 강화로 피신했을 선원의 모습도 함께 생각한다.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뒤로 하고 백성들과 성 방비를 포기하고 도망치기 급급했던 장수들의 모습, 비통했을 왕자들과 대신들의 모습이 슬프다. 그렇게 함락된 강화성은 불타고 마을은 약탈당했을 것이다.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 등 11개 항복조문,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으로 이어졌다.
인조는 정묘호란 이후 교동읍성을 쌓고 경기, 충청, 황해도 등 삼도 수군의 사령부를 교동으로 옮기면서까지 청나라 침입에 대비했지만 강화도 수비에는 실패했다. 원손만이 간신히 내관들과 교동도으로 피신했을 뿐이었다.
강화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탱자나무가 두 그루이다. 약 400살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들은 아마도 병자호란 전후해서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탱자나무는 원래 남쪽지방에 자라는 나무인데 조선시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기 위해 많이 심었는데 강화에 딱 두 그루가 남았을 뿐이다. 개성에도 북한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탱자나무가 있단다. 요즘은 기후변화로 곳곳에 심은 탱자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다.

선행천 둔치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졌고 어디선가 채석한 돌들도 하천변을 쌓았다.
선행천 둔치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졌고 어디선가 채석한 돌들로 하천변을 쌓았다.

선원면 선행리에서 시작된 선행천은 동락천과 합류하여 선원면과 강화읍 경계를 따라 흘러 갑곳나루 옆에서 염하를 만난다. 충절의 상징인 선원 김상용은 ‘선원’면으로 오늘도 자주 불리고 있다. 선행천 제방도로에는 벚나무가 나란히 심겨 있다. 붉은 색으로 정비된 둔치, 산책하기에 좋지만 자연적인 멋과 경관은 많이 아쉽다. 어디선가 파온 바위들로 하천변을 쌓았다. 하천변 붕괴를 막고, 하천환경을 개선하자는 취지이겠지만 어딘가의 산 옆구리가 파헤쳐졌을 것임에 마냥 반가워할 수 없다.
물길이 염하와 만나는 곳, 강화대교가 시작되는 곳은 야트막한 산은 당산이다. 염하 뱃길과 한강뱃길, 강화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곳이었지 싶다. 4차선의 강화대교가 개통하면서 빠르게 지나는 차량들로 그 존재가 많이 잊혀졌지만 갑곳리 느티나무와 성동리 느티나무는 수백년 세월 염하를 오르내리는 물과 배 그리고 염하를 건너는 사람들의 지켰을 것이다. 설악산에서 시작된 한강(소양강)물은 홍천강으로 만나고 남한강을 만나 온전한 한강이 된다. 내설악의 백담사와 장수대 벼랑계곡물은 흘러 흘러 강화 염하를 지난다. 오늘도 강화대교 아래 염하에서는 더리포구 어부들은 그물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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