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봉혜림원에서 MT를 하며 알게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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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혜림원에서 MT를 하며 알게된 것들
  • 김희중
  • 승인 2022.07.10 1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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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희중 / 시민기자
6일 오후 장봉혜림원 세미나실에서 열린 인천in 시민기자 MT.

7월6일 수요일, 인천in 시민기자들의 MT날이다. 오전 11시, 주안역 앞에서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탄 9명, 운서역에서 또 한 대의 승용차에 함께 한 4명, 도합 13명은 삼목항에서 LCM(상륙정)의 손자뻘 되는 카페리에 차를 싣고 장봉도로 향했다.

참으로 오랜만의 항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1975년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건조하여 인도한 26만 톤 유조선의 보증기사로 1년 동안 승선한 이래 이상하게도 배를 탈 기회가 없었다.

당시 항해중에는 길이가 300여 미터에 이르는 상갑판 위에서 조깅을 하는 선원들을 선교 바로 아래 데크에 있었던 내 방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일상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크긴 하지만 30여명의 선원들에게 을의 입장으로 눈치를 보며 소외된 생활을 하였으니 배를 탄다는 것에 나도 모르게 거부감이 자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우깡에 까맣게 덤비는 갈매기들과 잠간 조우한 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평온한 장봉 앞바다의 쾌청한 하늘이 닿은 수평선을 보니 옛 생각이 문득문득 이 풍경에 겹쳐졌다.

카페리는 신도를 경유, 두 번 째 장봉도 선착장에서 우리를 차에 태운 채 하선시키더니 주욱 줄지어 서서 육지로 나가려고 기다리던 승용차, 중소형 화물차 등을 싣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크고 편리하게 만들어진 선착장이 예전의 어려웠던 시절과는 아예 개념부터가 달라진 것이다.

생각보다는 큰 섬이었다. 혜림원을 향하는 길에 예정대로 콩국수집에서 점심을 했다. 의외로 관광지 치고는 비싸지 않았고 배고팠던 분들에겐 훌륭한 한끼가 되었다.  식사 후 그리 넓진 않지만 잘 포장된 시골길을 꾸불꾸불 달려서 장봉혜림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선배 시민기자 문미정씨를 만났다. 문 기자는 사회복지사로서 이곳 혜림원에서 가족과 함께 기거하며 일하고 있다.

간단히 인원점검을 했다. 문 기자를 포함한 여기자가 7명, 송정로 대표를 포함한 남기자가 7명 총 14명이다.

세미나실에 들어서니 이곳 이한형 원장이 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선량한 동네 아저씨의 인상이었다.

설명에 의하면 한마디로 이곳은 장애우들의 생활요양시설이다. 설립자의 고결한 이념과 희생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여러 어려움을 겪어왔고 첩첩산중으로 아직도 눈앞에 산적한 문제들이 이곳에 종사하는 이들에 상당한 부담이 되어 있었다.

짧은 공감을 남기고 우리들만의 시간이 되었다. 송정로 대표의 특강과 김정형 시민기자의 취재, 경험담 등이 이어졌다. 해가 길어져서인지 아직 한낮의 느낌으로 해변식당으로 몰려가서 매운탕으로 저녁을 했다. 그리고 작은 멀곶, 해변을 따라 한참을 걸어 바위가 있는 모래사장에 이르자 해넘이 순간이 왔다. 이곳의 정경에 녹아들어가서 자꾸만 뒤돌아보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세미나실에 모였다. 문미정 복지사의 인솔로 13만평규모의 현장순회 설명을 듣는 차례다.

장봉혜림원은 1954년 백십자사가 설립했다. 그리고 현재의 장소로 이전해온 것은 1985년이었다. 당시 원주민들의 거부반응도 거셌다 한다. 거기에다 섬이기에 이곳으로 와서 일을 하겠다는 복지사들도 찾기가 힘들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곳은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장봉혜림원과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장봉혜림요양원, 두 개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혜림원 전역을 개방하며 운영중이다. 누구나 출입이가능하여 소통이 용이하다. 개원할때부터 형편이 될 때마다 하나하나 거주공간을 집단형이 아닌 독립형주택으로 개량 보완하며 지어왔다. 그래서 이 거주공간의 형태로도 이곳의 힘들게 발전되어온 역사를 알아볼 수가 있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을 위하여 낙오되지않고 함께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이 결 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의 분류에 따라 적당한 도움을 주고 목표는 그 장애를 스스로 해결하고 극복하며 일상을 정상인들처럼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게까지 도움을 주는 사업으로 이해되었다.

장애의 유형, 정도에 따른 분류, 이 분류에 따른 치유과정, 즉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이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며 함께 생을 영유할 수 있게 돕는다.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진행상의 문제점들이 많다. 이들에게도 종국적으로는 격리에서 벗어나서 일반사회에 혼입되어서도 어려움 없이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와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100% 건강하고 완전한 무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중에 몇%가 될지 모르고 정도의 차이도 있겠지만 장애를 가진 가족이 탄생한다. 이를 우리는 전 사회가 사회적인 문제로서 공동책임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고민은 어느 누가 제안한 이상적인 해결 방법을 공감하는 무리가 많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이 제안이 만장 일치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될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시설에서 1박을 하고 시설을 둘러본 후, 뭔지 모를 무게에 답답함을 안고 섬을 나오게 되었다.

아! 이런 곳도 있구나.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오랜만에 마음껏 부풀리며 들이쉰 섬 바람을 조심스럽게 내쉬어본다.

1975년이 아니다. 그동안 눈부신 발전을 하여 이제는 선진국대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오늘은 2022년이다.

굶주리던, 배고프고 남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전후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이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가 되었다.

밖으로만 돌렸던 눈을 안으로 돌려 우리들의 가족들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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