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한 소남
상태바
스승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한 소남
  • 구지현
  • 승인 2022.07.25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간에서 만나는 소남 윤동규]
(4) 스승과 제자, 예에 대해 토론하다
소남문집에 실린 1753년 5월에 성호에게 보낸 편지

공자는 “예가 없으면 손발을 둘 데가 없고 눈과 귀로 보고 들을 데가 없고 진퇴와 읍양에 절제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기쁜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슬퍼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하면 문제가 된다. 부모가 돌아가신 것은 슬픈 일이지만 마냥 슬퍼할 수는 없기 때문에 3년으로 기한을 정해 애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상례이다. 혈연 혹은 사회적 관계에 따라 상복이나 애도기간이 차이 나는 것도 예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적절히 드러내도록 한 방편이다. 따라서 예는 인간사의 모든 일과 관련된다. 도학자들이 예학을 연구한 것도 바로 인간관계의 질서와 조화를 위한 것이다.

성호와 소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은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사제간에 항상 토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삼가 여쭙니다. 장단(長湍)의 근친 가운데 가형이 죽고 후사가 없자 그 차자(次子)가 대신 제주(題主)를 하였는데 혹시 직접 ‘효(孝)’자를 쓰는 것을 허용하셨는지요? 평소 들었던 것과 다름이 있어서 그 사람의 형편을 헤아려 하교하셨으리라 적이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 사람은 선생님의 위세를 빌어 책임을 전가해 막으려는 것입니다. 그 이웃이 구성(駒城)에 출입할 때 집안일을 맡은 사람이 말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혹시 이 일이 선생님께 전달되었는지요? 이 일 때문에 다시 생각하니 멱악(幎幄)이나 명정(銘旌)의 종류는 아마도 마땅히 반복해서 생각하고 길이 생각해야 할 듯합니다.(尹東奎, 「上星湖李先生書 癸酉五月」)

 

“제주”란 신주에 글자를 쓰는 것을 가리키는데, 제사의 축문에 상주는 아들이면 “효자(孝子)”, 손자면 “효손(孝孫)”이라 지칭하게 된다. 성호는 “효”라는 글자 뜻을 밝혀서, 적장자 혹은 적장손 즉 맏아들 혹은 맏손자인 경우에만 이 “효”자를 쓸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1753년 장단에 살고 있던 권귀경(權貴經, 1689~1753)이 죽었다. 권귀경은 성호의 외삼촌 권덕현(權德玄, 1652-1698)의 아들이니, 성호의 외사촌이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동생이 대신 상주 노릇을 하였다. 그러면서 축문에 이 “효” 자를 썼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적잖이 비판이 있었다. 더구나 이 비판을 받은 사람이 성호가 시켜서 그랬다는 식으로 변명을 하였던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소남은 위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 “효” 자를 쓴 일은 평소 적장자만 쓸 수 있다던 성호의 주장과는 상반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이 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성호가 비판에 대한 핑계거리가 되는 것을 깊이 우려하면서, 상례에 쓰이는 글귀는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장단의 일은 이런 것이네. 내 생각에, 옛날에는 대종(大宗)만 후사(後嗣)를 세웠으니 장자가 먼저 죽었을 경우 아버지의 명이 있었다면 오히려 전례로 끌어다가 후사를 이을 수 있네. 그렇지 않으면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다.”라는 예문이 있으니 무시할 수 없네. 이번 경우는 내제(內弟)가 살아 있을 때 장자 부부가 모두 죽었고 어린 손자가 있었으니 아버지의 명이 있고 없고는 논할 것이 아니었네. 지금은 불행히 조부와 손자가 함께 죽어서 후사가 없어 제사를 이어받을 사람이 없네. 적부(適婦)에 대해 소공복(小功服)을 입는 예로 미루어 보면 제사를 이어받을 사람은 차장자(次長子)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네. 만약 어린 손자가 먼저 죽고 아버지가 다시 그 후사를 세우는 일을 명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했겠는가?(李瀷, 「答尹幼章 癸酉」)

 

성호는 위와 같은 답장을 통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둘째 아들이 적장자의 역할을 하게 된 연유이다. 맏아들은 먼저 죽어 본래 후사는 손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번에 돌림병으로 둘 다 죽게 되어버렸으니 적장손도 없게 된 것이다. 생전에 후사를 정한 바가 없으니,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다는 예문에 따라 차장자, 즉 둘째 아들이 장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남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2년 후 성호가 보낸 편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지난 편지에서 장단의 후사를 세우는 일에 대한 말이 있었는데 바빠서 깜박 잊고 답을 하지 못하였네. 표제의 장자가 있는데 불초하여 함께 산 적이 없고, 부모 없는 손자만 있었는데 불행하게 손자와 조부가 나란히 죽었네. 후사를 세우는지에 대한 여부는 비록 설을 들은 적은 없으나 형이 죽으면 아우를 세우는 것이 예로 볼 때 당연하네. 예전에 의거하면 대종 외에 후사를 세운다는 예문이 없는데 근세에 분분하게 후사를 세우려고 하여 후세의 페단이 되었으니, 더구나 지금 후사로 세울 만한 사람도 없는 상황이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차자에게 상주가 되게 하였던 것인데 어떤지 모르겠네.(李瀷, 「答尹幼章 乙亥」)

 

위 내용을 보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소남과 성호 사이에 여러 차례 의견이 오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외사촌의 상을 당했던 시기 보냈던 편지와 내용은 같지만 훨씬 객관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의견이 오가는 사이 개인적인 일을 넘어 통상적인 예의 적용으로 발전한 것이다. 스승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는 소남도 놀랍고 제자를 끝까지 이해시키기 위해 자세히 설명하는 스승 성호도 대단하다. 이러한 토론이 있었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가 함께 성장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 가능했고, 학파로 발전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