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의미' - '희망버스'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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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의미' - '희망버스'의 희망
  • 장동훈
  • 승인 2011.08.0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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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칼럼] 장동훈 / 신부


지난달 31일 부산 영도구 봉래동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인근 대선조선소 앞에서
3차 희망버스에 참가한 수천명이
'정리해고ㆍ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주제로 문화행사를 벌이고 있다.

동굴 같았다. 간이 발전기가 만들어내는 힘없는 빛 덕분에 기계도 사람도 다 빠져버린 공장 안은 깊숙한 동굴 같았다. 4년을 공장정상화와 원직복직을 위해 농성하고 있는 부평 콜트 악기의 우울한 모습이다. 7월 어느 날 저녁, 장대 같이 내리는 장맛비를 뚫고 농성장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농성장을 지키는 이들의 헛헛함을 누군가 마음먹고 형상화한 듯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라고는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미사 후 비오는 날 막걸리에 딱 어울리는 파전과 감자를 나눠먹으며 어린아이처럼 흥분해 행복해 하는 이들을 바라보자니 억장이 무너졌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평소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콜트악기 노조위원장의 생경한 재잘거림에 사람도 기계도 전기도 빠져버린 텅 빈 공장을 지켰을 깊고 어두운 외로움이 전해오는 듯해 또 가슴이 미어졌다. 나 외로웠어, 정말로 외로웠어!

농성장에서 미사를 준비할 때면 늘 습관처럼 의미를 묻게 된다. 6월과 7월 사이 한진중공업 앞 미사를 꾸리기 위해 당일치기 운전으로 부산을 세 차례나 오가면서도 들었던 생각은 그놈의 알량한 '의미'였다. 길거리 미사로 이골이 난 선배신부 말처럼 미사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늘 그 의미 앞에서 주춤거렸다. 그러고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의미 있고 시의적절한 도움인지 한 번도 명쾌한 답을 내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늘 주춤거리고 비틀거렸다. 그놈의 '의미'가 뭔지.

생일 아침을 한진중공업을 지척에 둔 부산의 한 어귀에서 맞았다. 난데없이 날아든 최루액 섞인 물대포를 맞고 화끈거리는 팔뚝을 진정시키려 찾아간 근처 병원 화장실 앞에서 한숨 돌릴 때도 집요하게 따라붙던 것도 그놈의 '의미'였다. 그 옛날 죽어라고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처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여기까지 내려와 화장실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나 싶었다. 우승열패 논리가 선명하게 살아있는 곳, 그 자리에서 또 묻게 되는 것도 무력감과 그놈의 알량한 '의미'였다.

'희망버스'라고 명명했다. 희망? 정리해고가 철회될 그런 희망?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으로 되는 세상 같은, 그런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희망? 무슨 정성이 뻗쳤다고 여기까지 이토록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을까 궁금했다. 그들이 생각한 '희망'은 뭘까? 모르겠다. 옆에서 나처럼 궁상맞게 앉아 물티슈로 따가운 얼굴을 닦아내는 이의 희망조차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아침, 트위터에 올라온 1300일을 훌쩍 넘긴 재능교육 투쟁의 짤막한 소회가 눈에 들어왔다. "이노무 세상은 어케 천일동안이 아무렇지도 않아" 눈 하나 꿈쩍 않고 보란 듯이 돌아가는 세상에 희망 따위는 공염불처럼 흩어진다. 죽어라 두드리고 소리 질러도 세상은 마치 기계공이 잘 짜맞추어둔 톱니처럼 무심히 굴러간다. 희망? 그런 거 개나 갖다 줘라!

물대포를 맞고 망연자실한 사람들이 왜 그 자리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그랬다. 내가 만났던 것은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남긴 걸출한 운동가 김진숙도 아니었고, 경제인협회에서 복직대상 열외로 분류할 만큼 '강성'한 강철 같은 노동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갑작스런 회개 같은 정리해고 철회는 더더욱 아니었다. 더욱이 아직도 하늘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1300일 이상을 한데잠을 자고, 4년 이상 무인지경 텅 빈 공장을 지켜도 꿈쩍 않는 세상 앞에서의 무력감 역시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만난 것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단 한 사람, '고작' 단 한 사람 때문에, 그대로 둔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명명백백한 죽음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감성적이고 개인적이며 누가 들으면 나약하다 나무랄 정도의 수많은 '나'를 만난 거다.

동굴처럼 음습한 공장 안에서 드린 미사 중 내가 했던 강론의 수신자 역시 다름 아닌 '나'였다. 위로를 받은 것도 나요, 흥분해 낯선 수다스러움으로 오랜만에 웃어본 것도 나요, 길바닥에 앉아 지지리 궁상맞은 사람들을 쳐다보며 운 것도 결국 나였다. 알량한 의미를 묻는 이도 답하는 이도, 찾고자 했던 이도 찾아준 이도, 손을 내민 이도 손을 잡아준 이도 결국 나다. 수없이 분여된 '나', 그것이 꿈쩍 않는 세상 앞에 '의미'보다 저 만치 앞서 걷고 매일 내가 만났던 것들이다. 그래서 난 또 간다.


인천지역 대학생들의 모임 '청년광장 '회원들이
김진숙 지도위원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춤을 추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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