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맹휴와 윤광로... 안타까운 아들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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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휴와 윤광로... 안타까운 아들들의 죽음
  • 구지현
  • 승인 2022.08.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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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에서 만나는 소남 윤동규]
(6) 스승과 제자의 아들들
1742년 9월 14일 소남이 이맹휴의 장원급제를 축하하며 성호에게 보낸 간찰

소남이 스승 성호를 “삼생”과 같았다고 하였다. 길러준 부모, 가르쳐준 스승, 먹여준 임금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스승의 아들 이맹휴와의 깊은 인연은 앞서 설명한 바이다. “기린아”라고 표현할 만큼 태어날 때부터 기대를 받았던 이맹휴는 1742년 장원급제하였다. 이때 소남이 성호에게 보낸 간찰이 남아있다.

 

동규가 두 번 절을 드립니다. 서울에서 돌아온 아들에게서 순수[이맹휴]에게 들렀더니 선생님께서 원주에서 편안히 돌아오셨다고하였다는 말을 듣고 삼가 다행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또 순수의 병증이 깊고 얼굴이 밝지 못하다니 깊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어제 장원급제하였다는 말을 듣고 눈과 귀가 상쾌하였습니다. 하늘이 선생의 운이 회복되도록 도우니 앞으로 큰 과일의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순수 한 사람이 훌륭한 명성을 떨치는 기쁨만이 아니라 잠도 못이루고 어떻게 축하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이 이미 깊어 서리 내린 국화에 꽃이 피었습니다. 삼가 어떻게 지내시지는 살피지 못하니 사모하는 구구한 제 마음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윤동규, 임술년 9월 14일 간찰)

 

이맹휴는 진사로서 영조가 주관한 춘당대 전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이후 특명으로 한성부 주부에 임명되었다. 소남은 이를 “큰 과일의 징조”라 하였는데, 『주역』의 박괘(剝卦)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음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허물리라.”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다섯 개의 음 효 위에 한 개의 양 효가 올라 있는 박괘는 이제 양으로 회복되어가는 시초임을 보여준다. 탕평책을 실시하였던 영조의 시대였기에 조정에서 배척되었던 남인에게도 활로가 열릴 징조가 보였던 것이다. 집안일로 직접 축하하러 가지 못한 소남은 편지로 그 마음을 전하였다.

소식을 전해준 아들은 소남의 맏아들 윤광로(尹光魯, 1718-1754)를 가리킨다. 소남의 집안은 본가가 서울 용산[지금의 마포]였으므로 자주 오르내렸다. 윤광로가 서울에 갔을 때 일부러 이맹휴에게도 들렸고, 선산이 있는 원주에 다녀온 성호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마치 한 집안 사람처럼 서로를 방문하며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전부터 자주 있었던 것 같다. 소남의 문집에 실린 1741년 10월 성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소남은 선성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노량진을 건너기 전 성호에게 인사하러 갔다. 오랫동안 뵙지 못한 스승이 그리워서 찾아갔으나 공교롭게 성호는 외지에 나가 있는 상태였다. 이때 이맹휴와 하룻밤 같이 얘기를 나누면서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 해소하였다고 한다. 또 말미에는 부모님 기일 때문에 스승의 회갑연에 참석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며 대신 아들을 보내 마음을 전하겠다고 덧붙였다.

5년 터울로 태어난 스승과 제자의 아들은 여러모로 비슷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소남은 아들이 태어날 때 『논어』를 읽고 있었기 때문에 아명을 “노언(魯彦)”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노나라 출신이기 때문이다. 후에 “노” 자를 넣고 돌림자를 넣어 그대로 윤광로의 이름을 지었다. 성호가 『맹자』를 읽을 때 이맹휴가 태어나서 이름에 “맹” 자를 넣게 된 일과 마찬가지이다. 두 학자가 어느 때인들 경전을 읽지 않았을까마는 그만큼 아들들에게 거는 기대가 컸었던 것이리라.

그래서일까? 윤광로도 이맹휴만큼 똑똑한 아이였다. 말을 배우기 전에 이미 책을 들고 옹알이를 했다고 한다. 1744년에 성호의 생신에 축하는 글을 지었는데, 성호가 보고 문장이 이미 뛰어나다고 크게 칭찬하였다. 이듬해에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향시인 도회(都會)에서 장원을 하였다.

그런데 위 편지에서 보인 이맹휴의 병증에 대한 윤광로의 걱정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지속적인 병마 끝에 1751년 이맹휴는 끝내 병사하였다. 성호는 어린 손자에게 아비의 일을 잊지 않도록 손수 아들의 일생을 기록하여 남겼다. 그리고 “늙은이는 슬픔을 잊고 스스로 마음을 풀기를 잘 한다. 아! 천명인가 보다.”라는 탄식으로 글을 맺었다.

죽음마저도 평행이론이라고 해야 할까? 윤광로는 이맹휴를 따라간다. 역병도 잘 견뎌냈던 윤광로는 1753년 토사곽란을 하는 등 뱃병을 앓았고 1754년 치료하던 중 침을 잘못 맞아 겨울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맹휴의 죽음으로부터 3년 후에 소남도 맏아들을 잃게 된 것이다. 12월 소남은 “저 역시 사람이라 어찌 울고 싶지 않겠습니까만 제가 살 뜻을 잃고 슬퍼하기만 하면 며느리를 누가 돌보고 며느리가 살지 못하면 선조의 제사는 누구에게 맡기며 어린 손자는 누가 기르겠습니까?”라며 절절한 심정을 스승에게 토로하였다.

성호가 이맹휴의 행록(行錄)을 남긴 것처럼 소남도 어린 손자들이 아비의 일생을 잘 모를까 걱정하여 『장자행장』을 지어서 남겼다. 두 편 다 기대를 걸었던 아들의 일생이 객관적으로 기술 되어 있다. 그러나 말미에 슬픔을 넘어서려는 탄식을 보였던 성호와 달리 소남은 끝까지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슬픔과 고통, 걱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1742년에 쓰인 위 편지도 개인적인 우려와 기쁨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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