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안 지낸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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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안 지낸 추석
  • 조영옥
  • 승인 2022.09.28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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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조영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글쓰기반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가 9월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차례 간소화' 방안을 발표했다. 사진은 간소화 방안대로 차린 9가지 음식의 차례상. 사진=연합뉴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가 9월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차례 간소화' 방안을 발표했다. 사진은 간소화 방안대로 차린 9가지 음식의 차례상. 사진=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오늘 새벽은 한가롭고 여유롭다. 다른 추석 같았으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가 덜 된 것은 없나 살펴보는 시간이다. 탕국에 간도 맞추고 계란지단도 마저 부쳐서 썰어놓을 때다. 제기를 꺼내서 말끔히 닦아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닦고 음식을 진설할 상을 꺼내서 행주로 닦는다. 남편은 지방을 써서 신위를 모시고 병풍을 꺼내서 세워놓는다. 아버님이 옛날에 손수 짜서 쓰시던 고운 발을 제사상 앞에 깔아 놓는다. 향로를 꺼내 향을 피우고 거실이며 방마다 불을 켜서 환하게 밝혀 놓는다. 늘 하던 일인데도 이것저것을 챙기다 보면 어느새 일곱 시, 가까이 사는 막내 동서가 오고 다음에 둘째 동서네 가족이 모두 들어서면 손주들이 인사하느라 집안은 떠들썩해지기 시작한다.

결혼해서 조부모님의 제사부터 모시기 시작한 지 오십 년이 넘었다.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고 흙먼지 풀풀 날리던 시골길을 장을 봐서 아이를 업고 남편과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님과 남편이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제사에 나는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했다. 얼굴도 뵙지 못한 조상님께 졸리운 눈을 비벼가며 준비한 음식을 내어놓는 것은 나의 도리를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기일이면 열두 시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막내 동생과 내가 졸음이 와서 방 귀퉁이에 엎드려 잠이 들면 언니는 자지 말라고 자꾸만 깨웠다. 그때는 어른이 되면 졸려도 참고 제사 준비를 해야 되는가 싶어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 내가 맏며느리가 되어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도와주셔서 옆에서 거드는 정도였는데 몇 해가 지나면서 온전히 내가 책임지고 준비하였다. 어느새 부모님도 돌아가셔서 한식, 정월과 추석에 차례를 준비하는 것까지 일 년에 일곱 번 네 분의 제사를 지내면서도 당연히 해야 할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젊을 때라 그런지 힘이 들지 않았고 가족이 다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궁금한 것도 물어가며 벅적거리는 것이 사람 사는 것 같아서 좋았다.

십여 년 전에 유방암을 앓았다. 항암치료부터 33번의 방사능 치료를 받느라 내 몸과 마음은 지쳐있었다. 늘 피곤해서 눕고 싶고 모든 것에 의욕을 잃었다. 내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정상으로 오기까지 삼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남편은 결단을 내렸다. 이제 제사는 다 정리한다. 추석과 명절에만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한식에 몰아서 한 번으로 끝낸다. 그 대신 부모님 기일과 명절, 추석엔 성묘하는 것으로 대신 한다. 아무도 이의를 다는 형제는 없었다.

그렇게 줄여서 지내던 제사였지만 올해는 내가 남편에게 의사를 밝혔다. “둘째 시동생도 돌아가시고 자기 가족끼리 교회식대로 지내느라 올 수가 없게 되었는데 식구가 다 모이는 의미가 없어졌어요. 나도 힘이 들어서 감당하기가 힘드니 더 이상 지내지 않았으면 해요. 대신 동생과 날짜를 의논해서 성묘를 다녀오는 것이 어떨까요?” 자기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던 남편이 의외로 순조롭게 동의를 해주었다.

때마침 성균관 의례 정립 위원회가 추석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했다. 표준안을 받은 사회적인 여론은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분위기였다. 조상님께 불경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하여 혼자 곰곰이 나의 선언이 옳았나 생각하던 차에 표준안 발표가 다소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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